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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Jun 05. 2024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팀 오브라이언, 섬과 달)

독서노트 _45

세사대 과제를 하기 위해 이 책을 빌렸다. 과제를 하기 위해서는 책의 일부만 읽으면 되었으나 읽다 보니 다른 부분에도 흥미가 생겨 결국 다 읽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이야기, 그것도 베트남을 '침공'한 미국 군인의 시각에서 쓴 소설을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책을 읽다가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성과 이름이 다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카이오와'라고 불리는 이였다. 아무래도 그냥 이름같지는 않아서 검색해 보니 아메리카 대륙에 옛날부터 깃들어 살다가 미국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항복했던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었다.

카이오와족의 모습

그러니까 '카이오와'는 미국인과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다가 할 수 없이 항복했던 인디언 부족의 후손인데 베트남 전쟁에까지 나가게 된 사람인 것이다. 왜 다른 '오리지널' 미국인 군인들이 그를 원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엄연히 이름이 있었을 텐데) '카이오와'라는 부족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책에 나와있지 않다. 어쨌든 카이오와는 다소 독특했다. 그는 머나먼 베트남 전쟁터에까지 성경을 가져왔고 밤마다 성경을 베고 잤다. 그러면서도 배낭에는 그의 할아버지가 물려준 손도끼가 있었고, '조상때부터 내려온, 미국인에 대한 막연한 반감' 같은 것도 희미하게 엿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함께 복무했던 알파부대 부대원들 모두에게 친절했으며 유능한 군인이었다.


내가 볼 때 그는 자신의 조상들을 침략하여 결국 굴복시킨 미국인이 벌인 전쟁에 끌려와서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다른 부대원이 그가 떠드는 것을 제지하다가 이내 "말해, 난 말없는 인디언이 싫어"라고 해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동료의 그런 농담(?)을 친밀함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그런 농담을 대범하게 넘겨야 '진짜 미국인'이 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이 터졌다. 카이오와가 속한 알파 중대는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강 어귀 들판에 진을 치고 매복을 했는데 하필 그곳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 변소로 사용하는, 그러니까 말 그대로 '똥밭'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몰랐다가 비가 계속 오고 온 사방이 똥의 늪으로 변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눈으로 코로 입으로 온통 똥이 밀려들어오는 와중에 박격포가 터졌고 매복해 있던 카이오와가 맞았다. 그는 옆 동료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식을 잃고 똥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료는 그를 끌어내려고 애썼으나 비가 계속 왔고 똥냄새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며 카이오와는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똥의 늪 속에 카이오와가 잠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알파 중대원들은 날이 밝자 수색에 들어갔다. 대원들은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해 손을 잡고 발에 힘을 주어가며 똥밭을 밟고 또 밟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이오와의 손상된 시신과 군장을 찾아냈다. 조상들은 미국인과 싸우다 패배했고, 그 후예는 조상을 침략했던 미국인이 일으킨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똥밭에 파묻혀 죽은 것이다. 할아버지의 인디언 손도끼와 미국인이 발행한 성경을 동시에 갖고 있던 카이오와족의 후손은 그렇게 생을 마쳤고, 미국인 동료들은 똥밭을 밟아가며 그의 시신을 찾아내며 그를 비로소 '완전한 미국인'으로 받아들였다. 죽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카이오와'로 불렸지만.


전쟁을 일으키는 자와 직접 수행하는 자, 희생되는 자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나 전쟁에 대한 증오는 그것을 일으킨 '높으신 분'보다는 직접 몸으로 뛰는 일개 병사들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 개개인의 사연이 안타깝다가도 마냥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갓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밤, 몇십년 전 덥고 습한 어느 나라, 살아생전 와볼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이국에서 자신의 조상을 침범한 이들을 위해 싸우다가 똥밭에 파묻혀 죽음을 맞이했던 한 젊은 인디언 후손을 애도한다. 그의 진짜 이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이오와 인디언 방식의 이름일까 아니면 미국식 이름일까. 죽어서도 자신의 부족 이름으로만 남아 영영 알 수 없는 그의 진짜 이름을 나는 조용히 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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