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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시인 Sep 06. 2017

Prologue. 여행, 그러 ‘나’

#4. 사랑에 관하여

2016년 11월, 내 가슴이 새카맣게 재로 물든 바로 그날 밤


“0.111%로 면허 취소 수치가 나왔습니다. 억울하시면 채혈도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경찰의 강직한 목소리에 비해 아이같이 해맑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의 면상에 물을 적신 후, 이 상황을 복기해 본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향해 비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가출한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크게 나의 목젖을 점검한다.


“채혈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처리해 주세요”

경찰관의 무표정한 얼굴을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대신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그녀와 나는 미팅으로 오늘 처음 만났다. 1시간째 오지 않던 대리 기사 대신, 내가 그녀 차를 운전해 줄 원탁의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올림픽 대로의 어느 길 아래에서 서로의 목젖을 확인하고 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너무 미안해하지 마.”

차의 주인인 그녀를 향해, 담담하고 대담하게 목젖을 열었다. 그 후,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벌금 400만 원과 면허 취소 1년


차 없이 못 산다는 내가, 그래서 미팅 자리에 차를 두고 왔던 내가, 단 3시간 만에 스튜어디스에게 홀린 채, 변명의 여지없이 매우 깔끔하게 음주 운전 단속에 걸렸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오늘의 에피소드가 단지 허무한 시트콤보다, 거룩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밑거름이 되길 바랬을 뿐. 그러나 나의 바람이 산산조각 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만 원짜리 백하나 사주면 안 잡아먹지! 골프 레슨비 주면 안 잡아먹지!”

교활한 여우의 속삭임 덕에 '널리 인간을 화나게 하라'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내 심연의 끝에서 되살아 났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고는 관계를 마무리 지었다.


인연이란 참 우습다.
그리고 빈틈을 파고드는 외로움이 참 무섭다.


나의 사정을 잘 아는 '아는 형님'은 방황하는 나에게 네팔 여행을 권유하고, 아마 그때 처음으로 '아는 형님'의 말을 귀담아듣고, 그 날 티켓팅을 하고, 회사에는 잔다르크의 저주를 퍼부으며 퇴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네팔 가기 이틀 전, 기적적으로 그녀를 만난다. 크리스마스 연남동 어느 술집에서.


인연이란 권투다.
외로움으로 아무리 가드를 견고히 하고 있어도,

방심하는 순간 '훅'하고 들어와 어느 순간, 내 심장에 어퍼컷 한 방을 보기 좋게 꽂아 놓는다.   


"Merry Christmas!"라는 신음소리가 순식간에 입 안에서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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