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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시인 Sep 07. 2017

Chapter.0 여행, 그러 ‘나’의 시작

D-Day. OT, Bangkok, Thailand 161228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여행 가기 전, 반드시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눈에 나의 인상을 선명하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나의 본능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다시 만나고 싶어요."


어제 저녁, 상수동, 어느 이자카야에서 급하게 만난 우리는 사시미 한 점에 너와 나, 날것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달아나는 시간이 야속했지만, 그렇게 아쉬운 헤어짐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매우 간단한 짐을 꾸리고, 방콕을 거쳐 카트만두로 향하는 티켓의 시간과 호텔 장소를 점검하고, 평화로운 잠을 청했다. 


그날 밤엔, 나의 설렘을 시기하는 대장균이 썩은 사시미를 기회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공격 앞에 나의 대장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그들이 쏟아내는 막강한 대포를 견디다 못해 수차례 화장실을 드나들며 비명을 토해냈다. 이른 아침 비행기라, 늦은 귀가 후 단잠이 필수적이었지만, 포성이 울리는 뱃속을 마냥 외면하기에, 그들의 진격 속도와 화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대장균의 반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항철도 내에서도 지속되었는데, 그들의 끈질긴 게릴라전에 하마터면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 한가운데서 처참하게 주저앉아 나의 병사들과 함께 집으로 발길을 돌릴 뻔했다. 하지만 가야만 한다는 나의 의지가 쏟아지는 식은땀을 연신 격려하더니, 마침내 공항에 도착했고, 티켓팅 마저 무사히 마치게끔 도와줬다. 그러나 사투를 벌인 만큼 시간과 체력은 급격히 소모되었다. 그리하여 급하게 산 티켓만큼이나 급하게 싼 똥이 채 마르지도 않은 채, 약 한 봉지를 들고 겨우 비행기에 탑승했다. 

혼자 여행을 할 때에는 경유지가 있는 티켓을 선호하는 편이다. 어차피 혼자 다니는 여행이니, 매번 갈아타는 옆 좌석에는 누가 앉을지 기대 비용을 미리 계산하는 것도 즐거울뿐더러, 더 싼 값으로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 굳이 이런 좋은 티켓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네팔 여행 또한 방콕에서 하루를 체류한 뒤, 카트만두로 넘어가는 비행기를 선택했다. 운 좋게도, 방콕에는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성우, 현재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도시락, 반찬 신선식품 배달 스타트업 회사인 ‘배민프레쉬’의 CEO이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레고 머리 스타일이 가장 잘 어울리는 유쾌한 친구. 졸업한 뒤에 왕래는 많지 않았지만 언제나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녀석. 마침 혼자 방콕에서 방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네팔 가기 전 마지막 오리엔테이션을 그와 함께 하기로 했다. 사실 그에게 나는 마음의 빚이 있다. 그의 회사가 한창 어려울 때, 나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재정건전성은 리먼브라더스의 그것보다 처참하다는 것을 나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제안을 받았을 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어서 많이 서글펐다. 언젠가 언급되겠지만, 나는 주식 아니 엄밀하게 ELW라는 파생상품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또한 그렇게 힘들어하는 그의 레고 머리 속에서도 꿈이 있는 그가 부러워 나 자신이 많이 서글펐다. 


아마 그 후였을 것이다. 우리의 왕래가 더욱 뜸해진 것이. 그러던 어느 날, 그의 회사가 인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안도했고, 또 한 편으로 여전한 내가 서글펐다. 어쨌든 그는 훌륭한 업적을 그려가고 있고, 나의 소망이기도 한 네이버 프로필에 자신의 얼굴을 당당히 걸어두었다. 이제 그는 나의 위인이다.


'나의 위인'과 나, 카오산 로드로 향하는 유람선 위에서

위인을 만날 때 내가 돈을 쓰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런 의미로 마땅히 환전해야 할 태국 돈은 주머니 속 깊숙이 넣어둔 채, 오늘 하루 그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CEO의 스케일은 숙소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 최신식 시설의 호텔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루프탑 수영장,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방콕 시내의 전경은, 얼마 전 스케일링한 내 이빨을 더욱 하얗게 드러나게 해주었다. 

혼자 여행할 때, 나의 여행 스타일은 정해져 있다. 한국에서 산 여행서적 하나와 펜 그리고 편한 신발. 절대 데이터 로밍은 하지 않으며, 오늘 내가 가야 할 곳은 비행기 안 또는 숙소에서 고민한다. 배낭은 최대한 가볍게, 그렇게 그냥 걸어 다니기. 따라서 여행지에서의 시행착오는 언제나 나의 벗이 된다. 방콕에서도 나의 위인과 나의 벗이 함께하기에 외로움이 문을 두드릴 리 없다. 저녁이 되자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나의 위인과 나의 벗은 뚝뚝이를 타고 적당한 바가지를 얻어 쓰고 태국의 이태원 ‘카오산로드’를 탐험한다. 별 정보도 없고 사실 필요하지도 않았기에, 그저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니까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간다. 나의 위인이 나의 벗에게 말한다.


“여기 너무 맛이 없는 거 아니냐?” 알고 보니 중국집이다. 

여행객들로 가득찬 카오산 로드의 음식점들 

나의 권유로 나의 벗은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했고, 정체불명의 중국식 덮밥 음식과 네덜란드산 맥주를 안주삼아, 서로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만 꺼내놓는다. 


“ 네팔 가는 건 안 힘드냐? 이제 뭐할 거냐? 회사 그만두냐? 어머니는? 여자 친구는? 너 팀장도 참 괴롭겠다. 넌 회사가 어울리지 않아.” 


단문으로 완성되는 나의 위인과 나의 대화는 1시간쯤 지속되었으나 전날 대전투의 여파로 심신이 쇠락한 데다가, 잘못된 선택으로 머쓱한 나의 벗의 요청으로 간단히 호텔의 루프탑에서 칵테일 한 잔 하고 오늘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방콕의 밤은 아름답다. 아마도 훌륭한 호텔에서 훌륭한 위인과 함께이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정체불명의 덮밥과 하이네켄 맥주, 카오산 로드의 시행착오

나의 위인과 아름다운 밤을 만끽한 후, 차분하게 내일부터 그려질 나의 여행 경로를 예측한다. 일단 필요한 것은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과 포카라에서 자야 할 숙소. 그것이 선결과제다. 

아참! 그리고 내일 공항으로 갈 때 필요한 태국 바트! 

아름다운 방콕 시내의 전경, AVANI Riverside Bangkok Hotel

‘똑똑똑’ 

똑똑한 나의 위인에게 1만 원어치의 태국 바트를 얻었다. 

Thank you. My Grand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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