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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시인 Sep 09. 2017

Chapter.0 여행, 그러 ‘나’의 시작

Day 1. 설렘, Pokara, Nepal 161229

한국에서 벌어진 1차 대장균의 반란은 정체모를 중국집 덮밥의 기름진 공격으로 가볍게 진압되었고, 성우가 하사한 바트로 공항까지 무탈하게 도착. 입국 수속부터 일사천리로 진행. 1차 목적지인 카트만두로 향하는 비행기에 평화롭게 탑승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포카라. 네팔 제2의 도시이며, 히말라야 등산 및 트래킹 코스의 서쪽 출발점이자, 평화로운 호수와 풍요로운 자연, 풍부한 인심이 세계 각지의 트래커들 및 여행객들을 끌어 모으는 곳이다. 또한 이진욱, 조윤희 주연의 tvN 드라마 <나인>의 주요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니, 나도 오늘 하루는 알싸한 로맨틱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금일 나의 목표는 카트만두에 무사히 도착한 뒤, 포카라로 가기 위한 국내선 티켓 확보, 그리고 인터넷으로 미리 검색해 둔 포카라 숙소 <산촌 다람쥐>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최종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해야만, 다음날부터 진행될 히말라야 트래킹 코스 계획 및 준비물 관련된 정보를 구할 수 있었기에 <산촌 다람쥐>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어떻게 되겠지’라는 막무가내의 설렘으로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밀어내고 좌충우돌, 어드벤처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행의 가장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의 당연함이 여행지에서는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용기가 기어코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낯섦이 내 예상을 크게 뛰어넘었을 때, 인상은 추억으로 각인되어 기억 속에 저장된다.


사소하지만, 카트만두 국제공항이 나에겐 그런 기억이었다. 나도 꽤 다양한 공항을 겪어 왔지만, 이렇게 기억 속에 강력하게 인식된 공항은 처음이었다. 부산스러움과 미니멀리즘으로 대변되는 공항의 분위기는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유가 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승객들은 활주로의 자유스러운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입국심사대까지 향한다. 간혹 방향을 지시하는 공항 직원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활주로 중간에서 인간과 비행기가 평화롭게 펼쳐져 있는 장면은, 100년 후, A.I가 인류를 지배하게 되더라도 기계와 인간의 평화로운 한 때를 상징하는 좋은 메타포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활주로를 빠져나오는 동안, 미니멀리즘으로 대변되는 대합실에는 탑승을 위해 빼곡히 들어찬 온갖 사람들이 우리의 자유스러움을 부러워하듯이 창문 너머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고 나 또한 현재 내가 보유한 자유스러움을 과시하듯이 그들에게 환한 미소와 윙크를 날려준다. 자유롭게 삼삼오오 활주로를 5분 정도 걷다 보면, 비자 발급받는 곳이 나오고, 비자 금액을 지불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입국 심사대로 향하면 된다. 약간의 기다림을 감내한 후, 영예로운 입국 심사 도장을 획득하게 되면 네팔이라는 곳에 공식적으로 도착한다.

입국수속을 위해 활주로를 빠져나가는 자유로운 승객들, 카트만두 공항

이제부터가 큰일이다. 일단 Domestic 공항을 찾아가야 하는데, 인포메이션 데스크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둘러싼다. 말을 걸어온다. 부산스러우나, 위협적이지는 않다. 특히나 적극적인 한 녀석이 나의 보디가드 행세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제의하는 호의를 단호히 거부한 채, 나와 비슷하게 생긴 인종들이 가는 방향으로 나의 발길을 옮긴다. 그러나 나와 비슷하게 생긴 인종들은 이미 그들의  계획에 맞춰 지정된 차에 올라타거나, 다음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한 수순을 밟는다. 나 또한 짐짓 아는 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어리''버리'한 나의 행동은 이미 그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된다.


"이보게, 어린 친구, 포카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은 어디서 구하는 것이오?"

나의 보디가드 행세를 하던 ‘어리’게 생긴 네팔인이 내 손을 잡아'버리'고는 티켓을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나에게 맹세한다. 도리가 없다. 알았다고 하니, 나보고 ‘러키가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준다. 나는 '로맨틱 가이'이고 싶다.


마침 바로 갈 수 있는 티켓을 구했다고 매우 기쁜 듯이 말하는 그에게 나도 기쁘게 악수를 청한다. 단지 악수만 청하는 나를 향해 저주의 눈빛을 보낸다. 결국 나는 ‘어리’게 생긴 녀석에게 온화한 악수와 재치있는 윙크와 함께 팁 10불을 주어 ‘버리’고는(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이 나에게 원한 팁은 1달러였다) 나의 친구 시행착오와 포카라를 향한 비행기를 타러 간다.

120불에 구입한 포카라로 향하는 16인승 비행기

충격적이다. 여긴 한국의 시외버스터미널보다 훨씬 더 소규모다. 연타석 여행 각인은 여기서 시작된다. 작다. 작아도 너무 작다. 대합실뿐만 아니라, 비행기도 너무 작다. 너무 작아서 바람에 실려 날아는 갈 것 같은데, 과연 이 새빨간 16인승 비행기가 포카라까지 나를 정확하게 인도할 수 있을지,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 다행히 재잘재잘 나와 같은 인종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가워서 고개를 돌린다.


“혼자 오셨어요? 비행기 탈 때, 오른편에 타세요. 히말라야 풍경이 예술입니다”

세명의 중년의 여성분께서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지 까르르 웃으면서 나에게 좋은 좌석을 권한다.

이륙하기 위한 채비를 하는 비행기 안, 승무원은 30분 내내 허리를 펴지 못했다.

 “아, 네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비행기 티켓 얼마에 끊으셨어요?”

역시 나는 러키가이. 아무런 준비 없이도, 그들보다 겨우(?) 1.5배 비싼 비행기 티켓을 구입한 것이다. 수고로움에 비해 나의 당황스러움이 추억에 남을 것이기에 그 돈이 아깝지는 않다,고 애써 위안한다. 새빨간 비행기의 엔진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날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생각으로 가득한데, 이 좁은 비행기에 여러 인종들로 사람마저 가득 찼다. 승무원도 있다. 너무 작은 비행기라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하고 숙여서 서빙을 한다. 물도 주고, 사탕도 주고, 미니멀리즘의 세계도 서비스는 맥시멈이다.

포카라 도착 후, 비행기 옆에서 사진 한 방

30분간 오른편에 위치한 히말라야를 감상하며 생과 사의 지평선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으니, 금세, 포카라다. 많이 긴장했음이 틀림없다. 식은 땀이 촉촉하게 포카라를 맞이한다.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포카라 스웨트! 추락하지 않을까 걱정을 멈추지 않던 내 거친 생각과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 속에서도 늠름하게 제 소임을 다한 소형 비행기 앞에서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멋지게 사진 한 장 촬영하고 <산촌다람쥐>를 찾으러 간다. 어디에 나의 도토리가 있을까? 파도처럼 몰려 오는 택시 중 하나를 택해 흥정을 한다.


앗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네팔 돈으로 환전조차 하지 않을 것을 깨닫고 잠시 흥정을 멈춘 뒤, 돈부터 인출하러 간다. 당황스러움이 발동한다. 내 계좌에서 빼야 할 돈을 단기 카드 대출로 뽑아 버렸다. 낭패다. 또 떨어지는 나의 신용도. 악화되는 재정건전성. 다시 메꿔 놓으려면 족히 10일은 걸릴 텐데. 이번에도 '어떻게 되겠지' 라며 은밀하게 속삭이는 나의 친구 시행착오와 함께 흥정을 마무리하고 산촌 다람쥐에 도착한다.

 

“안녕하세요” 

포카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선 오른편에 탑승해야 한다. 멀리서 보이는 것이 히말라야 산맥이다.

전기를 아끼는지 오후 2시임에도 불구하고 마당을 따라 들어간 식당은 꽤 어두웠다. 짜파게티와 김치를 주문하고는 이것 저것 트레킹에 관해 쉴새없이 물어본다. 부부가 운영하는 듯한 한인 식당 <산촌다람쥐>는 맛있는 식사와 함께 트래킹 정보제공 및 예약 등을 도와주고 숙박할 곳도 친절하게 알아봐 주신다.


“아니,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온 에요? 파카 안 들고 왔어요? 파카 없으면 올라가서 얼어 죽어요. 파카 빌려야겠고, 침낭 없으면 얼어죽어요. 침낭 빌려야겠고, 포터(나의 짐을 들어주고 트래킹 코스를 가이드해주는 사람을 통칭하는 단어)는 내가 알아봐 줄게요. 내일 출발할 거죠? 어떤 코스 예상해요? 흐음. 가방은? 이거 하나? 우리 가게 배낭 공짜로 빌려줄 테니, 이거 메고 갔다 와요. 이렇게 준비 없이 온 사람은 처음이네. 호호호”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하는 나에게 아주머니가 격한 관심과 주의를 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핑퐁거리는데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시커먼 '남자' 대학생 4명이 라면을 거침없이 흡입하고는 침낭을 빌리러 간다고 한다.


"저 친구들 따라가세요."

헐. 난 로맨틱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대접받아야 하는데, 그들은 Gorgeous한

헐이 아니라 뎀에 불과하잖아. 

Damn it.


"오늘 밤, 포카라 축제하니 물건 빌리고 시내로 가서 구경해요. 생각보다 재미있을 거에요."

오호, Damn it은 내키지 않았지만, 포카라 축제는 내심 기대된다. 


간단하게 그들과 인사한 후, 트레킹에 필요한 물건을 빌리기 위해 거리를 나선다. 공구가 가능하니, 금액이 싸진다. 게다가 흥정하는 그들의 수완도 나쁘지 않다. 나도 모르게, 이득을 보게 되니, 첫인상에서 가졌던 그들에 대한 반감이 머쓱해진다. 약간의 대화를 주고받은 뒤,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주고, 쿨하게 헤어진다.


포카라에서 준비한 축제타임을 이제 즐길 차례다. 로맨틱 드라마의 주연인 나를 위해 세팅한 축제거리는 생각보다 꽤 스케일이 크다. 더군다나 거리는 이미 축제로 한창이다. 여기저기서 포카라에서 섭외된 카메오들은 삼삼오오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시골장터 같은 아기자기한 공간에 천진난만함이 수를 놓는다. 어쩌면 나는 이 축제의 엑스트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평화로운 거리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집결한다.

참 예쁘다. 꼬마 어른 할 것 없이 큰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한 기운이 맥락에 맞지 않게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서로를 바라보며 즐겁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생경하다. 나는 언제 저렇게 웃어 보았나? 웃겨보려고만 했지(이제는 그마저도 잘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런 의도 없이 저렇게 해맑게 웃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포카라의 주연으로서 어색하고 울컥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하늘을 수놓은 휘황찬란한 만국기. 그것의 소실점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무대라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스테이지.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소란스럽게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아장아장 리듬에 따라 춤을 추는 아기들. 무대 주변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까르르 까르르 웃고 있는 소녀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재빨리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축제를 구경하는 어린 친구들. 눈이 참 예쁘다.

헐. 레고 같이 작은 무대 위에서 진짜 예쁜 여자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진짜 예쁘다. 한국에서는 이 정도 미모의 가수를 섭외하게 되면, 주변에 경호원들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애기들이 경호원이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람들이 무대 가까이로 들이대는 것을 막아준다. 그 중 몇 남자들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그녀가 내뱉는 음성과 내뿜는 몸짓 하나하나에 작은 고함을 내지른다. 나도 어느 순간 그들과 함께 무대의 엑스트라로서 풍성한 탄식을 자아낸다. 우와, 우와, 헐, 헐.  무질서 속의 통제, 네팔에서 느끼는 3번째 각인이다. 내일부터 시작될 히말라야 트레킹의 축하쇼는 그녀의 무대와 함께 막을 내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감히 네팔의 '설현'이라고 이름을 칭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주변에서 춤을 추는 아이들이 인상적이다.

너무나 생경한 밤, 설레는 포카라.

문득 이 설렘을 그녀와 미치도록 공유하고 싶었다.

마치 로맨틱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안녕, H. 방콕에서 호화로운 충전을 마치고 오늘 네팔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당혹감 그 자체였단다. 이렇게 조그만 국제공항도 처음이거니와, 무심하게 활주로를 걸어 나오는 시크한 탑승객들 그리고 이어진 도메스틱 공항, 아니 시골 버스터미널보다 못한 수준의 대합실, 그리고 진짜 너무 조그마한 16인승 경비행기까지, 얼떨결에 바가지를 쓰고 도착한 포카라는 축제마저 한창이다. 시끄러운 노래 소리가 창살을 뚫고 들어와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설레더라, 그저 무심하게 비행기를 타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내가 카트만두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귓속을 파고드는 리듬에 고개를 흔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모습. 미지의 세계를 간다는 것의 설렘. 그래 맞아. 나는 지금 확실히 설레고 있어. 새로운 곳을 경험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인생은 참 가치 있는 일인가봐. 여태 나는 그것을 왜 잊고 살았을까? 크리스마스에서의 첫 만남, 얼굴 까먹지 않겠다고 만난 이자까야, 그리고 배탈까지, 우연과 당황스러움이 지배하는 시간이었지만, 그래 확실히 지금 난 설레고 있어.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심지어 우리가 안 날들보다, 다음 만남을 기다려야 하는 날이 더 오래 남았지, 지금의 설렘을 기억할게. 서로가 원하는 딱 맞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서로 딱 맞출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나를 단련시키고 올게, 이제 진짜 시작이다. 

숙소에서 바라본 산촌다람쥐, 평화와 고요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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