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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시인 Sep 18. 2017

Chapter.0 여행, 그러 ‘나’의 시작

Day4. HaffyNewEar, Deurali, Nepal 170101

방 안을 둘러싸고 있는 차가운 공기가 나의 숙면을 방해한다.
‘가방은 최대한 가볍게’가 나의 여행 모토 중 하나기 때문에, 방한 대책이라는 것은 나의 여행 사전 속에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오들오들 사시나무처럼 온 몸이 떨린다.


“파카 없으면 얼어 죽어요”

차가운 공기를 타고 <산촌 다람쥐>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Happy New Ear!’

불현듯  나타난 <산촌 다람쥐> 아주머니의 생생한 외침 덕분에, 출발할 때 대여한 구겨진 방한 파카를 가방에서 꺼내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따뜻하다. 여자 친구의 품처럼, 꽤 오랫동안.

하지만 차가운 공기가 예사롭지 않다. 파카를 껴입고 이불마저 뒤집어쓴 채, 잠을 청해 보지만, 변심한 여자친구의 마음처럼 냉정한 공기가 나의 꿈을 방해한다. 그럴 때마다, 신에게 올해만은 제발, ‘Happy New Year’라고 간절하게 주문을 외우면서 또다시 잠을 청한다.

차가운 뱀부의 고요한 아침, 멀리 보이는 파란 대문이 화장실이다, Bamboo

뱀부에서의 추운 아침은 밤새 쏟아진 비와 어느새 높아진 고도 때문이었다. 간밤에 추위와 씨름하며 뒤척이다가, 이른 아침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다, 무언가 찜찜한 마음으로 손을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트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난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수도꼭지를 따라 나를 놀리듯이 ‘깔깔깔’ 세차게 뿜어져 나온다. 차가운 공기에 한층 예민해진 나는, 나를 놀리는 개구쟁이 물과 절연을 선언하고 오늘부터 머리를 감거나 얼굴을 씻는 일 따윈 과감하게 포기한다.


나보다 항상 미세하게 더 부지런한 크리샤는 전날 밤 내가 주문한 아침밥을 시켜 놓고는 오늘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틀간 우리는 훌륭한 호흡을 선보였기 때문에, 한층 강해졌다고, 그래서 도반, 히말라야를 지나, 데우랄리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마지막 목적지의 전 단계인 MBC(Machhapuchare Base Camp)까지 가야만 한다고 강하게 브리핑한다. 어제 가장 큰 고비였던 ‘오르락내리락’ 계단들을 ‘하하호호’ 잘 견뎌냈으므로, 높아진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 또한 흔쾌히 수락하고 다음 목적지를 위해 계란과 밥, 야채를 곁들인 영양소를 섭취한다.  

자기 몸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재촉하는 크리샤

확실히 어제보다 수월한 길이다. 폭은 좁지만 완만한 경사의 흙길이기에 걷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유난히 마른 24살의 크리샤는 아침부터 스퍼트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최종 목적지인 ABC(Annapurna Base Camp)까지도 가능하다고 자꾸 나를 보챈다. 그러다 보니, 어제 새벽 바싹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던 차가운 공기는 어느새 달아나 자취를 감춰 버리고, 나의 체온은 높아진 고도만큼이나, 급격히 높아져 간다. 다행히도, 키가 높은 나무들이 보기 좋게 엉겨서 기분 좋은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적당한 타이밍에 휴식을 취할 때, 선선한 바람이 미처 씻지 못한 나의 얼굴을 싱싱하게 어루만지게끔 나를 내버려둔다.

분명히 원숭이를 찍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리샤의 재촉으로 다른 등산객보다 제법 일찍 출발한 탓에 히말라야에 거주하는 야생 동물들은 우리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의 발걸음 소리는 무시한 채, 몇 시간 후면 인간에게 양보해야 할 자신의 터전에서 마지막 주어진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런 그들의 집중력에 나는 샘이 난다. 그래서 끽끽거리며 신나게 나무를 타며 노는 원숭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휘파람도 불어보고, 우걱우걱 죽은 사체를 처리하다 나와 눈이 딱 마주친 늑대 녀석과 긴장감 있는 눈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동물 사체를 획득한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야생 동물

유명 사파리를 탐험하듯 우거진 숲을 지나치고 나면, 돌로 만들어진 사당 같은 것이 눈에 띈다. 새해를 맞이해서 히말라야를 지키는 신선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나의 사랑, 일, 우정, 꿈에 관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린다.

새해를 맞이하여 나의 간절한 소원을 기도한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크리샤와 나는 빠르게 흙과 돌로 구성된 오솔길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도반, 히말라야(뱀부, 지누와 같은 로지가 있는 게스트하우스 이름)를 빠르게 지나쳐서 예상 시간보다 1시간이나 빠르게 점심 식사 장소인 데우랄리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등산을 준비하는 트레커들과 하산을 준비하는 트레커들이 느긋하게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며 삼삼오오 모여 있다. 아마도 우리가 오늘 이곳을 방문한 첫 번째 그룹인 것 같다. 유럽인들, 미국인들, 중국인들 등이 각자의 그룹을 이루며, 누군가는 밥을 먹고, 누군가는 차를 마시고, 누군가는 책을 보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이제는 내가 즐길 차례다. 나에게는 여유를 만끽할 회심의 한 방이 있다. ‘하하호호’ 덕담을 주고받으며 어제 점심에 획득한 라면 두 봉지! 크리샤에게 너와 나, 이 소중한 신라면을 조리해 줄 것을 부탁한다. (모든 쉼터에서는 본인이 직접 가지고 온 라면의 경우, 기본 메뉴보다 싼 값으로 요리를 해준다. 이럴 경우, 코리안 누들의 가격이라고 쓰여져 있는 가장 비싼 라면은 반값 정도로 싸진다). 꼬들꼬들한 면발과, 매콤한 국물, 아직도 이 맛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인다. 해발고도 3200m에서 크리샤와 함께 먹는 ‘신’ 라면은 새해에 ‘신’이 내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신이 내린 맛, 라면, Deurali

신이 내려준 황송한 선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내리니,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마당으로 걸어 나온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혀를 내밀며, 하늘의 눈을 맛보는데,

맙소사.

어른들은 혀를 내두르며 하얗게 얼굴이 질린다.


통제불가능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얀 눈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해맑은 크리샤마저, 하얗게 잔뜩 질린 하늘을 우러러보며, 잠시 기다려 보자고 한다. 지금은 위험해서 꼼짝할 수 없다고 한다. 어쩌나, 점점 쌓여가는 눈이 심상치가 않다. 일찍 도착한 데우랄리의 뿌듯함도 묻혀 버린 채, 기다림이 점점 길어진다. 화난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니, 맛있게 해치운 라면의 맛도 데우랄리 마당에 파묻혔다. 나의 환호작약이 기름을 부어버린 것인가? 하얀 폭죽이 그칠줄 모르고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물품을 나르기 위해 오르락 내리락 하는 현지인, Deurail

세차게 쏟아지는 눈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신이 한수 가르쳐주기라도 하듯 각각의 풍경에다 하얀 눈을 포갠다. 웅성웅성 거리는 이곳의 사람들. 누군가는 등산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하산을 포기한 채, 완성된 한 폭의 수묵화를 바라만 본다. 도리가 없다.  


“오늘은 여기서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내일도 기상상황이 안 좋으면 ABC는 포기해야 할 수도 있어요”


끔찍한 소리. 어떻게든 가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쏟아지는 눈은 어느새 발목마저 덮어 버리더니,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발목을 덥썩 잡아버렸다.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많은 군중들이 혀를 내두르며 식당으로 모인다. 공교롭게도 한국인은 나뿐이고, 동양인이라고 해봤자, 라면을 먹을 때, 해맑은 나의 모습에 이끌려, 교사라고 소개한 중국 여인뿐이다.


와이파이는 언감생심, 순식간에 어둠과 함께 외로움이 무섭게 찾아온다.

무서운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간절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외로움’은 ‘기다림’에게 끊임없이 함께하자고 노크하지만, ‘외로움’은 결국 ‘나타남’으로 인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법이다.

쏟아지는 눈 속에 갇힌 세계 각국의 등산객들, Deurali

“Do you have a room? We are four people yeahyeah. 야야, 올라와, 방이 있나 봐”


 낯익은 목소리가 나의 귓구멍을 정통으로 때린다.


‘Happy New Ear’ 재빨리 식당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포카라에서 함께 파카를 대여했던 시커먼 호랑이 대학생 4명이 흰 눈을 머리에 얹은 채, 쭈뼛쭈뼛 서 있다. 머리 위 하얀 눈을 후레쉬 삼아, 시커먼 어둠을 뚫고 당도한 그들의 모습에서  여기에 오기까지 고난의 시간을 얼마나 보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Happy New Year”


주인 행세를 하며, 반갑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한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와 나 우리는 아군을 얻은 듯 서로에게 인사를 나눈다. 지칠대로 지친 시커먼 대학생들은 당장 씻을 곳과 밥 먹을 곳, 그리고 잘 곳을 물어본다. 크리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여러가지 그들의 위태로움을 해결해 준 뒤에, 마침 비어 있던 6인용 숙소에 다 함께 묵기로 한다. 무뚝뚝했던 포카라에서의 만남과 달리, 서로가 서로에게 ‘하하호호’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절박한 상황이 한편으로 간사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감사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우리는 단 몇 분만에 최고의 룸메이트로 자리매김한다.

눈 속에 갇혀 할 일이라고는 사진 찍는 일 밖에 없다. 크리샤와 나, Deurali

안녕 H, 오늘은 몹시 외로운 하루였어. 오후부터 시작된 눈이 밤이 되어도 그치질 않더니 결국 목표한 MBC까지 가지 못하고 데우랄리라는 곳에서 머물러야만 했어. 해발고도 3200미터인 이곳은 눈이 와서 그런지 어제보다 더욱 혹독한 추위가 나를 괴롭히고 있어. 그리고 혹독한 추위보다 더욱 지독한 외로움이 어느 순간 빠르게 나에게 스며들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포카라에서 만난 대학생들이 기적처럼 나타나더니 나의 외로움을 눈 녹듯이 제거해 주었어. 참 신기한 일이다. 지난 2016년은 나에게 너무나 많은 좌절감을 맛보게 해 준 한 해였는데, 마지막 순간 네가 내 인생에 신비스럽게 나타났어. 이런 신비스러움이 나를 또 한 번 상처받게 하지 않을까, 두려움이 일어 그저 만남일 뿐이라고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려 보아도, 사실 난 너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는다. 마치 예정된 너를 만나기 위해 과거에서부터 쉼 없이 달려온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 느낌. 한국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너는 어떤 마음일까? 몹시 궁금하다. H. 내 이야기 잠시 들어 줄래? 오늘 나의 목적지는 MBC였고, 원래 나의 꿈은 MBC였어. 하지만, 난 부끄럽게도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 여유 있게 도착한 데우랄리처럼 여유 있게 tvN이란 곳에서 PD 생활을 짧게 경험했었어. 불행히도 난, 중요한 갈림길에서, 지금처럼 쏟아지는 매서운 눈을 무시한 채, MBC라는 더 넓고 거대한 곳을 무리하게 가려다가, 내 안의 자만심과 오만함때문에 보기 좋게 미끄러져 버렸어. 때로는 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다시 그 길이 보일 때, 기회를 잡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도전할 줄 알아야 했지만, 난 참 어리석게도, 고독한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아. 결국 난 고립된 채, 그렇게 9년을 허비하고 말았어. 그래서 너를 생각하면 나의 외로움이 우리의 관계를 망치지 않을까 두려움이 먼저 생기는 것도 사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불구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외로움을 떨쳐내고 일어서려고 해. 어제의 나는 결국 미끄러져 MBC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내일의 나는 반드시 MBC에 도달할 거라고 아랫입술 꽉 깨물고 진지하게 다짐해. 신기하게도 너를 생각하면 나는 참 솔직해지는 것 같아. 다시 만나는 날, 아랫입술 꽉 깨물고 진지하게 너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Haffy New 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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