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붕시인 Sep 21. 2017

Chapter.0 여행, 그러 ‘나’의 시작

Day 5. 정상에서, Deurali, Nepal 170102

새해를 축복하던 세찬 눈보라가 지나가니,
눈부시게 하얀 새 아침이 찾아온다.


고운 햇살 하나가 창문을 넘어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볼을 곱게 어루만진다.
꿈인가? 아주 따뜻하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금세 나의 관심은 멀어지고, 침낭과 이불을 겹겹이 뒤집어쓴다.
영상과 영하 사이에서 고민하는 실내 온도를 극복하기 위해,
영상이 있는 침낭의 극한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현실은? 아주 춥다.라고 칭얼거린다.

방이 부족해 다이닝룸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해맑은 포터와 외국인의 모습, Deurali

“형 일어나세요, 아침 먹고 얼른 올라가시죠. 오후에는 또 눈 온대요.”


아침을 깨우는 활기찬 육성 팡파르가 침낭 구덩이 속에서 나를 꺼내 준다. 너희들 아침부터 아주 생생하구나. 역시 군인은 다르군. 어젯밤 해군사관학교 생도라고 소개한 그들은 임관하기 전에, 친구들끼리 마지막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힘든 곳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곳에서 겪은 각자의 스토리를 자신의 히스토리와 함께 생생하게 전달한다. 물론, 약간의 과장도 있었을 테고, 약간의 허풍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포카라에서 ‘Damn it’이라는 대명사로 일갈하던 나의 오만함을 가슴 깊이 반성하고, 기적처럼 외로움을 처치해준 그들을 위해 ‘It’ Them이라고 칭송한다. 결론적으로, 크리샤와 같은 훌륭한 가이드가 없어 고생하던 그들에게 나는 길동무를 제공해 주는 대신, 그들은 나에게 좋은 말동무가 되어 주기로 한다.

새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아침이 밝았다. 잊을 수 없는 광경이 앞으로 펼쳐진다.

밤새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행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크리샤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오늘의 일정을 우리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오늘 오후가 되면, 어제처럼 또 눈이 쏟아질 수 있다는 믿기 힘든 크리샤의 예언에 따라, 어제의 최종 목적지였던 MBC를 거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ABC에 점심이 되기 전 재빨리 도착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아한 만찬을 즐긴 후, 눈이 오기 전, 이른 오후에 데우랄리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하는 크리샤. 고요한 아침이 강단 있는 크리샤의 외침으로 가득 찬다. 문득 나는, 어제와 달리,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5명의 ‘it’ them은 출발지와 도착지가 동일하다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짐을 모두 숙소에 남겨두고 양손과 두 어깨 모두 가볍게 등산할 준비를 한다. 내가 드디어 그곳으로 간다고, 늘 지금처럼 무사히 다녀올 것이라고, 영광스럽게 하얀 눈 위로 서약을 한다. 나의 발자국이 도장을 남긴다.

눈이 가득 쌓인 길, 길 위에다 나의 발걸음을 한걸음씩 새겨 놓는다.

새파란 잉크를 왈칵 쏟은 것처럼 하늘이 새파랗다. 쏟아진 잉크 사이로 눈치 없는 하얀 구름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산등성이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하얀 구름을 매달아 놓는다. 과연 이곳이 히말라야다.

산봉우리 위에 걸려 있는 구름

‘한결’ 가벼운 걸음과 ‘함께’라는 들뜬 마음은 눈이 제어하고 있는 땅의 속도를 무시하고, 자꾸만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라고 재촉한다. 압도적인 스피드를 과시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온 세상 지구인들 다 만날 것만 같다. 앞서가던 등산객들을 추월하며, 윙크를 깜빡거린다. 그리고 환한 미소와 함께 여유롭게 “하이”를 발사하며 보다 더 높은 곳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내딛는다. 1시간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무게를 견딜 새도 없이 어제의 목적지 MBC에 도착한다.

MBC 표지판

MBC와 최종 도착지인 ABC는 모두 전문 등산객을 위한 베이스캠프(Base Camp)가 되는 곳이다. 특히 봉우리 모양이 매우 특이한 곳을 베이스캠프로 삼고 있는 MBC는 마차푸체르 베이스캠프의 준말인데, 크리샤는 앞 글자의 'M'이 한국어로 ‘솅선꼬뤼’라고 매우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새파란 하늘 아래서 새하얀 구름들을 순찰 중인 저 봉우리가 ‘생선 꼬리’랑 꽤 비슷하게 생겼다. 나를 포함한 5명의 전사와 크리샤는 생선 꼬리를 배경으로 보기 좋게 기념사진을 찍고 MBC에 입성한다.

규모가 큰 MBC를 배경으로 사진 한방, MBC

전문 등산객들의 베이스캠프이기에 지금까지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규모감을 자랑한다. 로지의 수도 많고, 다이닝룸도 꽤 크다. 우리는 그중 한 곳을 골라, 잠깐 동안 둥근 탁자 주변에 둥글게 둘러앉아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


“형은 지금 뭐하세요?”

“나는 시인이란다. 붕시인, 벗 ’붕’ 자를 쓰지. 주의할 것은 장음을 써서 길게 발음해야 한단다. 언젠가 난 너희들의 감성을 달래줄 친구 같은 시인이 될 거야. 하하하”


배를 잡고 데굴데굴 쓰러지는 띠동갑 친구들(히말라야에서의 적당한 과장과 허풍은 용서되는 법)! 동갑이라고 굳게 믿고 농을 친다. 사실은, 광고회사를 다니고 있으나, 곧 이 일을 그만두고 작가가 될 것이다. 그때 너희는 나랑 찍은 사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을 꼭 기억하라고 또 한 번의 과장과 허풍을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낸다. ‘하하하’ 허풍스러운 웃음과 ‘오오오’ 고풍스러운 감탄사가 묘하게 섞여 따뜻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이 기세를 타고 차가운 바람이 쫓아오는 해발고도 4200미터 ABC를 향해 고속 질주한다.

4명의 해군사관생도를 위한 사진 한 컷, ABC로 가는 길

MBC에서 ABC로 가는 길은 예술이다. 수식어로 잘 표현해 낼 자신이 없다. 그냥 예술이다.


티 없이 맑은 새파란 하늘 아래, 서로 뽐내기 바쁜 갖가지 모양의 산봉우리, 그것을 사이좋게 이어주는 산등성이, 그리고 하얗게 물든 대지 위, 위잉 위잉 불어오는 바람 소리, 어젯밤 신이 살며시 덧칠한 눈까지. 이토록 광활한 자연의 주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은 점이 되어, 탁 트인 시야를 바라만 본다. 장엄한 기운이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주 발걸음을 멈추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자연이 만든 대형 그림을 이쪽, 저쪽, 여기, 저기,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여념이 없다.

규모감이 우리를 압도한다. 산과 구름, 하늘과 눈
카메라의 종류는 필요없다. 찍으면 예술이 된다.
크리샤의 카리스마, 그의 예언대로 구름이 몰려온다.

담아내기에 바쁜 우리와 달리, 크리샤는 땅 위에 쌓인 눈으로 대형 하트를 제작한다.
나는 재빨리 그 하트를 빼앗아 핸드폰에 보관한다.

문득, 하트의 주인이 생각난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생각을 하다 보니,
4명의 전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크리샤가 제작한 하트를 몰래 사진에다가 훔친다.

‘Annapurna Base Camp’ 해발 4200미터 ABC에 드디어 도착했다.  

친절하게 반기는 표지판 주위로 윙윙거리는 바람이 경계심을 잔뜩 품고 우리의 자격을 심사한다. '신성하다'는 단어가 생각난다. 바람의 심문을 마치고 마주하는 표지판을 돌아, 탁 트인 앞을 바라보니, '경이롭다'는 단어가 생각난다.  

마지막 목적지에서 5명이 함께, ABC

크리샤가 넋을 잃은 우리에게 손짓한다. 발자국이 없는 것으로 보아, 등산로는 아닌 것 같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가장 좋은 스폿을 소개하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기념비가 있다. 누구라고 말할 것도 없이, 군인 특유의 절제된 동작과 위엄 있는 목소리로, 넋을 향해 일동 묵념을 외친다. '뭉클하다'는 단어가 가슴에서 피어난다.

박영석 대장의 기념비, 꽂혀 있는 태극기와 적혀 있는 글귀들이 나를 뭉클하게 했다, ABC

아는 형님이 나에게 가라고 했고, 박영석 대장이 나에게 오라고 했다.


산이 되어 잠들어 있는 박영석 대장의 기념비


산촌 다람쥐에서 본 글귀가 떠오른다.

수수께끼처럼 한쪽 벽에 붙어 있던 글귀가 이곳에 오니 저절로 이해가 된다.

동료를 구하러 갔다가 산이 되어 버린 박영석 대장,


정상에 도착했다는 뭉클함과 정상을 도전하다가 산이 되어버린 먹먹함. 이것이 눈물이 되어 나의 마음을 적신다. 다행히도 흐르는 눈물이 새까만 선글라스에 막혀 하얀 눈 위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정상에 혼자 우뚝 올라서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옹졸한 생각이 부끄럽다.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그런 역경을 뚫고 마침내 정상에 선 사람은 훌륭하다. 하지만,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이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할 때, 그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이 생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에 위치한 ‘자리’가 아니라, 정상에 ‘함께’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깨닫는다.


나의 위인 조성우가 생각났다. 정상에 선 너와 몸부림치는 나는 이렇게 격차가 벌어졌지만, 너는 나에게 바트를 주고 나는 너에게 시행착오를 주며 서로를 격려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언젠가는 함께 정상에 오르길 고대하는 것을 어렴풋이 나는 바라는지 모르겠다.

ABC를 배경으로 사진 한 컷, ABC

‘함께’ 정상에 오른 우리 5명은 솟구치는 뭉클함을 겨우 떨쳐내고, 거룩한 히말라야의 풍경을 눈과 가슴에 담아내기 바쁘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기념으로 비싼 가격 때문에 그동안 망설였던 피자와 라면을 푸짐하게 주문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정상에 선 기쁨을 ‘함께’ 나누며 자축의 시간을 가진다. 

이 맛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피자와 차, 라면 남김없이 해치웠다, ABC

이제 정상에서 내려올 시간이다. 짧은 정상의 황홀함을 맛 본 뒤, 내려오는 시간의 무게는 황당함 그 자체다. 3시간을 쉼 없이 올랐지만,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데우랄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오르막길의 큰 산은 정수리가 보이기 싫어,
그렇게 나를 잡아당기더니,
내리막길의 큰 산은
그렇게도 쉽게 나를 밀어댄다.
축하하듯 흩뿌리는 눈꽃은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한다.


자연과 너희가 함께 있으니,
빙의하듯 이유 없이 순간적으로 시 한 구절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윙윙거리던 바람이 우리에게 주문을 건 것일까?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깨지 듯이 아프더니, 구토 증세마저 찾아온다.


“데우랄리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어요” <산촌 다람쥐> 아주머니의 음성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데우랄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난 쓰러진다. 영상과 영하의 경계를 넘나들던 숙소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맛본다. 침낭과 이불 숲을 헤치고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가 동면을 취한다. 갑자기 찾아오는 무력감.


눈에 쫓겨 산을 천천히 음미히지 못하고 급히 정상을 찍고 돌아온 나를 포함한 3명의 전사들은 말로만 듣던 고산병에 제대로 걸렸다.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나의 상태가 가장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17시간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이, 깊은 꿈속으로 무력하게  빠져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Chapter.0 여행, 그러 ‘나’의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