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고3병? 고산병, Jhinnu, Nepal 170103
고산병 : 고도가 낮은 곳에서 2000미터 이상 되는 고지대로 급하게 올라갔을 때 산소농도의 밀도에 순응하지 못하고 산소가 부족하여 나타나는 급성 반응으로 구토 및 어지럼증 등의 증세가 발병하고 심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모든 것의 실마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자신감’이라는 부스트를 장착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의 유혹을 물리치기 힘들다.
그.러.나.
모든 것의 문제는 자신감의 ‘과잉’에서 시작된다. 넘치는 자신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만심으로 변질되기 쉬워서 이것을 어떻게 통제된 마음속에 잘 보관하느냐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오늘도 한 게임?” “좋지, 콜! 또 누구누구 간대?”
“강백호, 서태웅, 용팔이, 너, 나 5명!” “굿, 야자 제끼고 포카 치러 가자!”
깊은 침낭의 참호 속에서 이불을 방패 삼아, 고산병에 맞서 고군분투하던 나는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 방학 시절로 돌아갔다.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에게는 골든타임이라고 불리는 시절이 있다. 학교에서는 야자시간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그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 통제하려고 했지만,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수험생의 육체와 정신을 구속하는 일은 학교 입장에서도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점에서 하염없이 일탈을 꿈꿨다. 언제나 시험에 대한 자신감은 넘쳤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당시 나는 고3이 가져야 했던 당연한 목표인 대학 진학 대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원페어, 투페어를 외치며 서로의 패를 읽는 심리 싸움에 더욱 열중했다. 승리시 주어지는 돈이라는 대가는 매우 달콤했다. 물론, 카드게임에 대한 자신감도 언제나 차고 넘쳤다. 하지만 잘못 설정된 목표는 고3이라는 현실에 순응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수능 실패라는 결과로 귀결되었고, 결론적으로 재수라는 극한의 심리적 부담감에 휩싸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행히도 여전히 시험에 대한 자신감은 남아 있었고, 주어진 100일간의 시간 동안, 철저히 스스로를 통제하며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비로소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고산병과의 치열한 전투 속에, 고3이라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허황된 자만심과 그릇된 목표 설정으로 허비하게 된 재수 시절, 그때 기억이 갑자기 생각났다. 지금의 두통과 어떤 연관성도 맺지 않은 채, 매우 갑작스럽게.
“생강차 한 잔 드세요, 머리가 좀 괜찮아질 거예요. 식사는 안 하실 거예요?”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며 갑작스러운 환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늠름한 해군 생도 한 녀석이 고산병에 함께 맞서 싸우기 위해 나의 침낭 속으로 침투한다. 겹겹이 쌓인 이불을 파고들더니 따뜻한 생강차를 건넨다. 간신히 침낭 굴에서 겨우 빠져나와 생각차, 아니 생강차를 들이킨다. 일정한 시간 간격에 맞춰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17시간 만에 어둡고 습한 침낭에서 빠져나오니, 어느새 상쾌한 데우랄리의 아침이 찾아왔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아군의 참전으로 고산병에서 간신히 탈출한 나는 고산병 방어에 실패한 원인 분석으로 쉴 새가 없었다. 아마도 고산병의 침투는 3일간의 단련으로 인해 산소에 순응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앞으로만 자꾸 나가려고 재촉하는 나의 넘치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신성한 히말라야의 신선은 나의 이런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해 나에게 17시간 동안의 벌, 아니 강제 휴식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랬더니, 데우랄리의 아침 햇살이 나의 두통을 공중으로 순식간에 태워 보냈다. 거짓말같이 머리는 괜찮아졌고, 우리 모두는 하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것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수월 하다. 거리는 분명 동일한데 시간의 길이는 심하게 차이가 난다. 길목마다 군데군데 지뢰처럼 깔린 눈길과 얼음길만 조심한다면, 올라가는 시간에 비해 내려가는 시간은 두배 이상 절약할 수 있다. 순식간에 데우랄리에서 뱀부까지 500미터를 내려온 우리는 고산병 치유 기념으로 라면을 함께 한다. 이틀 전, 뱀부에서 찌릿찌릿 연락을 주고받던 그녀에게 ‘살아 돌아왔노라’고 시그널을 보낸다 찌릿찌릿.
짜릿한 라면의 맛을 혀 끝에 남겨둔 채,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뱀부를 지나면 이제 눈의 세계를 벗어나 땅과 돌의 세계인 시누와로 가는 길이 시작되고, 그 후, 시누와를 지나면 악명 높았던 ‘오르락내리락’ 계단의 세계인 촘롱에 진입한다. 촘롱에서 간단히 간식을 나눠 먹고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오늘의 마지막 도착지 온천의 세계, 지누에 도착하게 될 예정이다.
지누에서부터 3일을 고생하며 올라갔는데, 하루 만에 지누까지 간다고 하니, 약간의 허무함이 혀 끝에서 맴돈다. 하지만, 주변의 띠동갑 친구들과 이런저런 말을 섞어 가며 함께 내려가니 허무함이 고산병처럼 사라진다. 역시 정상에 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리라.
똑같은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뱀부에서 시누와, 그리고 촘롱까지 펼쳐진 길에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 여유롭게 펼쳐져 있다. 오르막길에 지쳐 잠시 숨을 고르는 말들, 무엇이 그렇게 고단한지 길에서 누워 자는 당나귀,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먹이를 쪼아대는 닭과, 우직하게 주변을 바라보는 버펄로들, 그들을 벗 삼아, 여기저기 쉼 없이 뛰어다니며 울려퍼지는 마을 꼬마들의 웃음소리.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내 눈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후후’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오로지 정상에 오르겠다는 의지만으로 이 길을 올라갔었는데, 지금의 나는 ‘휴휴’ ‘물 한잔 먹고 쉬고 갈까?’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의 상태를 물어보기 바쁘다. 이렇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히말라야의 풍경이 나는 참 마음에 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천, 천 하나, 천 둘, 천 셋…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촘롱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개수를 무의식적으로 세기 시작한다. 1300개 이상의 계단을 빠짐없이 세고 있는데, 누군가 ‘무지개다!!!’라고 외치는 바람에 그 개수를 까먹고 말았다. 1300개 이상 쌓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계단 위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가 지나온 길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목표 달성을 인증하듯이 서명처럼 남겨져 있다. ‘후후’하며 '혼자' 올라간 지난 시간과 '휴휴'하며 '함께' 내려간 오늘의 시간 사이에서 신선을 비롯한 나를 지켜준 많은 요정들이 무지개 너머로 그동안 고생했다고 반달 웃음을 내어주는 듯하다. 나는 자만심을 으깨고 남은 빈 자리에 자신감을 심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고, 무지개 너머 히말라야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4시 정도가 되어, 지누에 도착했다. 3일간 전혀 씻지 못한 나는 도착과 동시에 온천으로 향했다. 생강차를 그렇게 열심히 날라주고, 고산병 전투를 함께했던 4명의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전하며, 온천으로 향하는 값싼 입장권을 대신 끊어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원 없이 씻었던 것 같다. 내 안의 모든 부정적 요소를 벗겨내듯이.
얼마 후, 따뜻한 온천 속에서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자만심으로 변질되지 않을 것 같은 시원한 공기가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자신감 주위를 감싼다.
안녕 H, 사흘 만에 정갈하게 몸을 씻고 지누에 도착하자마자, 휘몰아치는 자신감으로 너에게 이 기분을 전달하고 있어. 지난밤, 나는 고산병으로 인해 17시간을 미친 듯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단다. 하지만 고산병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하지 않는 법을 배운 것 같아 내심 기뻐. 지나친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질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지난 날들,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라면서 다시금 반복하던 지난날의 실수들, 그렇게 떠나보낸 수많은 이별과 남겨진 후회와 아픔. 나의 벗 ‘시행착오’는 언제나 늘 나와 함께였어.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관계에 있어서도 한단계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같아. 이틀 전, 새해 안부 문자를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긴 나에게 너는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라는 재치 있는 문자를 보냈지. 지누에 도착하자마자 '깔깔깔' 즐겁게 웃을 수 있어서 고마웠어. 아마도 이런 재치가 너와 나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아. 그런 재치에 보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곳에는 등산하는 사람끼리 지나칠 때, ‘나마스떼’라고 서로를 향해 꼭 인사를 한단다. 물론, '하이'를 외치는 사람도 있고, 새해이기 때문에 더러는 ‘해피 뉴 이어’라고 인사를 건네기도 하지만,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이 마주오는 사람에게 서로의 안전과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인사라는 일종의 의식을 치룬단다. 이런 서로에 대한 배려 덕분에 무사히 지누에서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것 같아. 나의 꿈이든, 서로를 향한 관계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지난 날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는 자만심이라는 덫에 걸려, 실패라는 결과를 항상 맞닥뜨려야 했어.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 여태까지 자신감이 변질되지 않도록 나를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는데, 그것이 바로 '배려'라는 것을 말이야. 고산병에 걸린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던 너를 보면서, 예전에 내가 잘못했던 나의 시행착오들이 떠올랐어. 앞으로의 나는 넘치는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네가 내게 보여준 재치 만큼 너를 향한 나의 마음엔 배려를 항상 동반하려고 해. 인연의 끈에 이끌려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지속된다면 시간의 길이만큼 반드시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할 때도 있을 것이고 불평할 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오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자신감과 서로를 향한 변하지 않는 배려가 있다면, 그 어떤 난관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또한 그것을 통해 우리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강해질 것이라고 믿어.
건너편에 걸려 있는 무지개를 타고 얼른 너를 보러 달려가고 싶어. 그래서 내가 이곳에서 배운 배려심을 너에게 어서 빨리 시험해 보고 싶다. 결코 자만심으로 변하지 않을 배려심을 말이야. 조금만 기다려줘. 화려한 빛이 가득한 남산, 그곳에서 꼭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