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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잉 Nov 08. 2020

열심히 노력했는데 아이는 상처 투성이인 엄마에게

박우란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를 읽고 

박우란의 저서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엄마와 정서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돼 있는 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건강한 관계는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당시 자신을 양육했던 부모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맺어질 수 있는데요. 성장 과정에서 건강한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개인의 상처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네가 잘 되길 바란다'면서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주입시키는 태도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10여 년 간 수도원에서 영성과 심리를 공부한 저자의 독특한 이력답게 엄마라는 개인을 한 부모의 딸, 여성, 엄마 등의 정체성으로 분절해 다각도로 분석해 깊은 감명을 줍니다.


제가 인상깊게 읽었던 대목은 모두 제가 육아에서 어려움을 겪는 쟁점이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엄마 스스로가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기, 객관적인 좋은 엄마 등의 내용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엄마가 아이에게 사랑만 줄 것이라는 인식은 모성신화에 가깝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질투와 복수, 보상심리, 투사 등도 포함하는만큼 정서 이면에 있는 질투와 분노, 좌절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네요.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방식으로 아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에 아이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너무사랑스럽다고 느끼다가도 왠지 모를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 불편했거든요. 이런 감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기가 참 어려웠는데, 정신 상담에 오랜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이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아이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려면, 엄마 스스로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점도 인상적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욕구를 은연중에 아이를 통해 해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인데요. 이 측면 역시 제가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라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딸과 엄마가 특별하긴 하지만, 그 특수성에 집중하기보다 인간관계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갈등의 실마리를 제시해줘서 개인적으로는 좋았습니다.


또 '객관적인' 좋은 엄마는 없다고 강조한 점도 좋았습니다. 좋은 엄마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기보다, 아이와 내가 개별적으로 갖는 관계를 통해 서로의 장단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만 되면 이상적인 엄마와 현실 속 엄마의 간극을 받아들이게 돼서, 이런 표현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엄마랑 나랑 정말 안 맞는데,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엄마가 나한테 화를 많이 내서 내가 상처를 받기도 하는데, 엄마도 참 여린 것 같아." 이런 말을 들을 때 부모는 자신의 단점을 고치려고 하기보다, 단점을 받아들이고 아이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하는 방향으로 아이와 합을 맞춰가는 게 낫다고 합니다.


저도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있습니다. 언제나 아이를 수용하고 또 아이의 부족한 면을 잘 파악해주는 엄마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저도 이 이미지를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아이와 나의 상태를 공유하는 데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가장 인상깊었던 대목은 정신적으로 부지런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주문이었습니다. 현대인은 몸은 바쁘지만 정신적으로 그만큼 나태해지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점이라고 느끼기에 다음에 같이 발췌해 봤습니다.


조르조 아감벤의 책 <행간>에서 말하듯, 나태의 그리스 어원은 무관심이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과 관계하면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 특히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관련이 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주의와 관심을 충분히 쏟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그것이 내가 기울이고 싶은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도 편의성이 들어간다. 열심히 하지만 좀 더 나태한 방법으로 열심히 할 수 있다. 의존이 편의성의 이면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아이들의 요구와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은 역시 꽤나 피곤하다. 아주 단순하게 풀어 얘기하면, 무심한 엄마는 나태한 엄마라는 것이고, 이것은 물리적 나태를 이야기한다기보다 정신적인 나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리적 부지런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역설적이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지런하면서 나태한가. 우리는 자신에게서 혹은 자기 접촉과 사색, 성찰에서 멀어지기 위해 극도의 부지런함, 즉 육체적 희생을 자처한다.


아쉽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엄마'라는 정체성을 파고드느라 '여성'의 속성을 일반화하는 과정은 이해하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거든요. 여성이 보호받기를 원하고,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주장은 일단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찾음으로써 실제 하는 외부 원인을 못 보게 하는 부작용도 일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404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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