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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잉 Feb 09. 2021

N번방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를 읽고

‘요즘 루다 성희롱하는 재미로 산다’

‘패배자들아, 난 루다 자* 하는거 보러 간다’     


개인정보 유출 문제로 서비스를 중단한 AI 챗봇 '이루다'는 사실 시행 초기부터 논란이 많았다. 이용자들이 루다에게 혐오 발언을 일삼거나 성희롱을 하면서부터였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이루다를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며 '걸레', '성노예'라고 부르는 이용자들이 등장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루다를 개발한 업체는 '연애의 과학'이라는 애플리케이션에서 연인 간 성적 대화를 포함한 데이터를 축적해 이루다를 탄생시켰다. 연인이 은밀하게 나눈 성적 대화가 이루다를 통해 성적인 만족감을 느끼려는 이용자들에게 악용된 셈이다.     


성적 호감을 느끼기 적합하지 않은 대상에 호감을 느끼고, 성희롱을 서슴지 않는 이들의 행태는 지난해 3월 세상에 알려진 N번방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미성년을 협박해 성을 착취한 결과로 수익을 올리고, 수익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통신기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한 점에서 그렇다. N번방을 만든 운영자들은 대부분 구속됐지만, 겉모습만 바꿀 뿐 또 다른 N번방이 양산되고 있다. N번방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사회 환경은 그대로라는 얘기다.     



여성주의 교육연구소 대표인 김동진이 기획하고, 교육현장의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대담해 완성한 <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는 N번방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현행 교육의 문제점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진단한다. N번방 최초 신고자인 '추척단 불꽃', 청년, 유치원·초등학교 교사, 중·고등학교 교사, 교대 졸업생, 대학, 기혼 남성과 여성, 문화예술인 등이 한 데 모여 자신의 일터나 일상에서 느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실천 방법을 공유한다.     


저자는 서론에서 이 책의 지향점을 먼저 밝힌다. 우리 사회 전반을 페미니즘으로 나아가게 하는 교육을 만드는 것이 그 방향이다. 이 때 교육이란 정해진 답을 주입하고 외우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페미니즘 이슈를 스스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음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를 페미니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교육을 의미한다.     


생업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밀어붙이는 일이 쉽지 않을텐데 대담 참가자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자신의 몫을 고민하고 있었다.      


먼저 '여자는', '남자는'으로 주어가 시작해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가장 첫 공간인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고민하는 교사가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또한 n번방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일 수 있는 청소년들을 교육하려면 교실 안의 교육이 아니라 교실 밖, 일상 속 교육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의 주장에 공감이 갔다.      


남성에게도 성평등교육이 필요한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피해자성을 강조하면서 여성, 남성을 구분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나는 이 지점에서 남성과 함께 성평등을 논의할 여지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과 다수의 남성들에게 소외받는 남성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컸다.     


149p
N번방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페미니즘 교육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정말 여학생만이 피해자일까?' 하는 것이다. 남고에서는 여학생을 대상화하기도 하겠지만 당장 눈앞에는 없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여성적인 남학생'에게 훨씬 더 큰 폭력이 가해진다. 어떤 상황에서는 성소수자 학생들, 특히 남성 성소수자 학생들이 교실 속 권력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피해자성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여학생, 남학생을 나눠 교육하는 것은 이분법을 강화하고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분노를 동력으로 삼는 페미니스트'를 만드는 교육이 학교와 교사의 몫이 맞는 것인지 항상 고민한다. 다른 성별을 싸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해서 젠더를 기반으로 평등을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를 만들고 싶다면 계속해서 고민해 봐야 하는 부분이다.     



216p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이 있다. 일상 언어 속에서 식욕, 수면욕 같은 욕구나 욕망들이 대부분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성욕, 특히 남성의 성욕은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것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 본인의 성욕을 '해소'하는 행위 자체가 된다. 상대가 누구인지, 상대와 어떤 관계인지는 사소한 문제로 바뀌이ㅓ 버린다. 그래서 성욕 '해소'의 방편인 포르노 속의 여성은 늘 대상화되며 인간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성욕을 '해소'히는 도구로 그려진다.
그러나 "섹스는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일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다." 남성의 성적 욕망이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방향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여성은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도구화될 것이다. 성욕의 '해소'를 위해 여성을 성적 폭력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68p
성평등교육은 여학생만을 위한 교육으로 종종 오해를 받는다. 일부 학생들과 일부 보호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성평등교육은 남학생의 권리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성평등교육의 목적 중 하나는 여학생이 자신의 교육 권리를 인식하고, 교육 환경 안에서 보호받고, 성별 고정 관념이나 성차별주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성평등교육은 동시에 여학생과 남학생 모두가 배움의 장 안에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SNS에서 '일탈계'를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



무엇보다 N번방 사건에서 SNS 성적인 메시지를 올린 청소년들에게도 일부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이 책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닫게 해 줬다. 여성 청소년의 '성'은 남성과 달리 존재하지 않거나 억압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SNS 등 '대나무숲'에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고 싶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무성욕'의 존재이기 어려운 여성 청소년은 억압된 일상을 피해 은밀한 공간에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 공간에서 그들은 여성 청소년의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빌미 삼아 성을 거래하는 범죄자들을 만나 피해자가 된 셈이다.     




추적단 '불꽃'의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가 N번방의 전후 사정과 신고, 보도 과정에서 겪은 장애물을 다뤘다면 이 책은 N번방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교육자들의 고민과 성찰을 다뤘다. N번방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을 쪼개서 생각하기에도, N번방 사건에 관여한 한국사회의 문제 중 하나를 꼽아 깊이 있게 파고들기에도 좋은 책이다.     


https://brunch.co.kr/@orintee/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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