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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결혼 기간 5년 '갱신제' 도입되면 어떨까

정여랑의 <5년 후>, 계약결혼으로 '종신제' 결혼의 결함 고발

by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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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지금의 배우자와 연애하면서 프랑스의 ‘팍스(PACS·Pacte Civil De Solidarite)’ 제도를 처음 알게 됐다. ‘시민 연대 계약’ 정도로 번역되는 팍스는 1999년 동성 커플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만들어진 후 이성 커플의 결합에도 자주 쓰이는 제도로 남게 됐다. 팍스를 맺은 이들은 서로의 의사에 반하면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지만 양육, 재취업 등 결혼한 부부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기존의 결혼을 선택하는 이들은 독실한 종교인, 상류층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팍스 제도로 연인과 살고 있는 저자는 자신의 삶에 파트너를 들이는 삶이 가능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결혼이라는 관계의 형식보다, 서로의 삶에 서로를 들일 만한지를 파악할 수 있어 관계의 내용부터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본질이 삶의 동반자를 찾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면 과도한 책임과 구속력을 갖는 결혼보다 팍스가 더 관계의 본질을 이어가는 데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이었고, 제도의 한계를 뛰어넘을 생각은 하지 못했던 나는 이 제도 안에서 배우자와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떤 제도든 개인의 노력에 따라 장점을 취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년 후>를 읽으면서 계속 이 제도가 생각났다. 결혼 제도의 무게가 개인의 존엄을 압도한다면 굳이 그런 제도를 이어갈 필요는 없다. 혹은 제도의 무게를 가볍게 해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놓인 개인(특히 여성)을 자유롭게 만들 수도 있다. 한국에 없는 제도를 도입한 작가의 상상력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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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3년이 지난 지금, 결혼제도의 장점을 어느 정도는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자의 가사와 돌봄 노동 참여도가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다만 우리 모두 온전한 개인으로서 지내는 시간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는 더 싼 주택담보 대출금리를 알아보거나 아기에게 자산을 증여할 방법을 찾느라 연차를 내고, 나는 연초에 집중된 생일 등 시가 식구들의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 회사에서도 이벤트 가격비교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데 시간을 쏟는다. 시간이 남으면 그는 게임을 하고 나는 책을 본다. 연애 때처럼 음악 동호회 사람들과 노는 약속을 잡거나 맛있는 술을 찾아다니는 식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최소한 20년 동안 친밀함을 나누며 양육 의무를 다 하기 위해 ‘비즈니스 파트너’로 살아갈 것이다. 배우자는 아직 내게 매력적이며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도 괜찮은 사람이다. 하지만 <5년 후> 속 선우와 같은 이유로 결혼 계약제 도입에 찬성한다. 20년 뒤 아기가 성인이 되면 배우자에게 한 번 얘기를 꺼내볼 생각이다. 행복하기도 했지만 버겁기도 했던 이 제도를 유지할 의무가 사라졌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 속에 서로의 존재가 있는지,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인지 그에게 묻고 싶다.


남성 위주의 장시간·정규직 고용 구조 바뀌어야


현실 속 기혼 여성은 <5년 후>에 나오는 사례처럼 갖가지 불평등을 떠안고 산다. 혜선이 이혼했던 것처럼 가사, 돌봄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미영처럼 능력 있는 여성은 2020년 기준 6명 중 1명꼴로 육아를 위해 경력단절을 택한다. 현실적 문제나 주변 시선을 이유로 폭력, 외도 등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배우자와 이혼하지 못하는 사례는 언론사 사회부 사건팀의 단골 기사거리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의 군상이 다소 전형적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결혼 제도가 여성에게 더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인 현실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5년제 도입을 위해 바뀌어야 할 게 있다. 남성 위주의 장시간·정규직 고용 구조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2017년 8월 기준 대기업이면서 정규직인 근로자는 전체 임금 근로자의 10.7%인데 이들의 임금은 중소기업이거나 비정규직 근로자의 1.8배, 근속연수는 2.3배에 달한다. 이런 구조는 청년·여성·장애인 고용 부진 등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경력 단절·고령 여성, 장애인 인구의 재교육, 재취업에 대한 합의에 나선다면 결혼 계약제 도입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에도 힘이 실릴 것이다.


한 가지 더, 아들이었던 주영의 커밍아웃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담담하게 대답한 형숙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네가 아들이든 딸이든 나는 네 엄마야. 엄마가 같이 있을게.” 혹시 내가 딸에게 커밍아웃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됐는데, 이보다 더 괜찮은 반응을 아직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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