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외모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야근이 있는 날은 당일 오후 6시까지, 철야를 한 뒤 오전 9시 이후부터는 내 시간이다. 52시간 제도가 도입되고 철저하게 노동 시간이 통제됐다. 기자는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워라밸 가치의 도래와 노동법의 강제에 힘을 잃은 덕분이다. 나는 이번 주 야근 '덕분에' 평일 시간 이틀에 걸쳐 마사지샵과 피부과를 다녀왔다. 야근 동안 폭삭 늙어버리는 걸 상쇄하고 나에게 힐링이 되는 시간. 무엇보다! 미모...라고 부르긴 뭐 하고 내가 갖고 있는 미적 레벨을 높이는 숭고한 시간이다.
이게 다 외모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각혈)
외모는 진입장벽을 낮추고 내 주장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같은 조건의 경쟁자와 작은 차이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당장 나부터 누군가와 마주 보며 얘기를 해야 한다면, 잘생기고 예쁜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은 이 같은 진리가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는 방증이다.(진지함) 외모는 경쟁력의 핵심은 아니지만, 분명히 경쟁력의 한 부분이다. 외모 가꾸기가 폄훼된다면, 그건 외모'만' 경쟁력으로 생각하는 사람한테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더 나은 결과물을 냈을 때 외모 덕을 봤다는 얘기는 불쾌하다. 내가 직접 들었던 최악의 멘트는 "넌 얼굴 취재가 되잖아"라는 동료의 발언이었다. 물론 그 친구는 악의를 담아 한 말이 아니었고, 내 얼굴의 미적 수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다는 결정적 하자도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쌍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대 때렸던 것 같기도 하다. 단언컨대, 오롯이 외모 덕에 이룩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외모가 일절 통하지 않는 강한 상대도 있다.
애매한 건 바로 여기다. 외모 '덕'은 분명히 있지만, 이 걸 주 무기로 삼으면 안 되고 보조 도구로만 써야 한다는 사실. 안 그래도 외모의 미덕을 강하게 요구받는 여성의 경우, 외모 덕을 결코 보지 않았다고 강변해야 '내면의 노력'을 간신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나는 기자생활 중에 열심히 일하며 좋은 결과를 만드는 예쁘장한 여기자들이 어떤 뒷담화를 감내해야 했는지 너무 많이 봐왔다. 외모의 힘을 '적절하게' 이용하려는 자는, 서로 모순적인 이익의 균형을 잡기 위해 잔뜩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몄다는 '꾸안꾸' 패션은 패션에 무심한 듯 보이면서도 주위에 미적 만족감을 준다는 점에서, 패션 전략일 뿐 아니라 일터의 처세다. 여성에게는 특히. 예를 들면 액세서리는 화려하지 않되 분명히 기능을 하고, 화장은 색조가 없되 음영을 주면서 이목구비는 뚜렷해 보이게 하는 식이다. 결론적 메시지는 "저는 꾸미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쁘죠?" 아, 여기까지 쓰고 보니 뭐 이렇게까지 살아야.
지나치게 애매하고 미묘한 이 '외모 이용하기'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한 번 해보라고 조언하기도 어렵다. 그러니까 "실력이 아니라 외모를 이용하라는 겁니꽈!"라고 반박이 나오면, "아, 꼭 그런 건 아닌데 아닌 건 아니고..."하고 말이 꼬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외모 가꾸기를 추구하다니 어이없소"라는 비판을 받으면 "자, 이제 밤을 새볼까"하고 피곤하고 긴 토론을 해야 한다.
물론 한때는 외모를 가꾸는 것 자체에 자책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가부장적 사회가 강요한 미의 기준에 복무하느라 내 몸을 소비시장의 전쟁터로 만든 바보 같은 년이야!" 하지만 더 이상 가부장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제능력도 갖춘 중년의 여성이 되고 보니 까짓 거 개썅 마이웨이 나의 욕망에 충실할 뿐 "너네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게 됐다. 젊은 여성들이여, 자책할 것 없다네. 그저 즐거운 대로, 자신의 기쁨이나 이익이 되는 대로 움직이시게.
이미 젊은 팀원들은 내가 쓸데없이 고민하고 나름의 내적 투쟁(?) 끝에 얻은 결론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신을 가꾸는 데 열심인 듯하다. 약간 불편한 점은, 나의 어린 시절과 같은 이유로 여전히 여성들은 그런 노력을 감추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되레 남성들은 자신이 얼마나 헬스장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멋있는 근육이 발산하는 매력을 얘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뭐, 점점 나아지겠지. 나는 일단 젊은 이건 늙은이건 가리지 않고 제발 꾸미라, 뭘 믿고 이런 몰골로 사냐고 소리 지르고 다닌다. 제갈공명급 '내면의 능력자'가 아니라면 당신의 성취를 위해 가꿔야 할 것이다. 아참, 제갈공명조차 키가 8척이 넘고 얼굴이 옥같이 아름다웠다는 게 삼국지의 설명이다.
ps. 결혼도 했는데 왜 외모에 신경을 쓰냐는 지적도 분노를 일으킨다. 내가 결혼 따위에 신경쓰느라 그런 줄 알아? 거칠게 말하면, 내 만족과 사회생활의 도움 때문이다. 심지어 잡은 물고기라 생각했던 남의편조차 지속적인 미모를 요구하는 현실적 난제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