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장수애섬식당
계획에 없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제주도 협업이다. 촬영을 하고 소개글을 쓰는 일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찾으려면 새벽 첫 비행기를 타야 한다. 숙박료를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이동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보통이라면 그랬을텐데. 이번에는 조금 더 여유를 부려보려 한다. 나는 지금 지쳐있다.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따발총처럼 연달아 터지면서 몸도 마음도 마치 깊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것 같다. 일상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내면의 여유는 사라져버렸다. 기운을 잃은 듯한 피로감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던 차에 운명처럼 제주도 협업이 찾아왔다.
운명처럼. 때로는 우리가 선택한 길이 아닌 예상치 못한 상황이 우리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풍경 또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내 인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운명같은 순간이 희소식은 아니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약간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였다. 매번 여행을 떠나야 하는 블로거지만 나는 짐을 챙기는 일을 정말 싫어한다. 매번 풀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아니 생각처럼 귀찮은 일이다. 이번에는 약 한 달만의 여행이다.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여행의 텀이 벌어졌다. 생각해보니 지난 11월 초 이후로 나는 트렁크를 열어본 적이 없다. 여하튼 캐리어 안에 들어가 있는 옷들은 모두 늦가을 옷들이다. 지금은 벌써 첫 눈이 내린 겨울이지 않은가. 다행히 얼마전 노스페이스에서 구입한 겨울 패딩을 챙겨입고 온 것만 해도 스스로 기특하다 할만큼 내 머리속은 갈피를 자지 못한다.
이럴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마음은 따뜻한 전기장판이 켜져있는 이불 속이지만 그럴수는 없다. 이미 돈버는 블로거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이고 벌써 하고 있던 일을 서서히 정리까지 하고 있는 마당에 넋놓고 있다가는 손가락 빨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서둘러 버스를 탔다. 이번 협업건은 딱 하나이기 때문에 굳이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제주도 여행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사진을 찍는 일은 이제 습관이 되어 버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몇 달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고민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에 집중하면서 햇살이 비추는 나뭇잎의 움직임, 골목길에서 피어나는 꽃의 색,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까지 셔터를 누르는 순간부터 특별한 그림이 된다.
화면 속에 담긴 순간들을 쫓아가다보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오늘따라 세상이 참 선명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어 나갔다. 문득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보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나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줄 누가 알았겠는가.
촬영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뺨을 스쳤다. 작은 카페를 찾아 들어가서 일단 몸을 녹였다 블로거에게는 그 날 그 장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확인해 보는 순간이 중요하다 .다행히 사진은 근사했다. 잠시 창 밖을 보며 해결해야 할 일을 천천히 되뇌어 보았다. 운명처럼 굴러 들어온 돌은 박히기 전에 설 곳을 없애버려야 한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따뜻한 음식이 그립다. 엄마의 손맛이 담긴 따뜻한 밥상이 필요했다. 빈 속에 커피를 마셨더니 속이 아리다. 찌를듯이 따갑기도 했다. 위염이 도진건가. 그럴만도 했다. 생각해보니 벌써 사흘째 밥 구경을 하지 못했다. 명색이 맛집을 열심히 다니는 블로거인데 밥을 먹지 못하다니.
문득 엄마 밥상이 떠올랐다. 7남매의 아침을 차리기 위해 엄마는 늘 새벽부터 분주했다. 부엌 바로 옆에 있는 내 방에서는 아니 넷째, 다섯째, 여섯째의 방에서는 해가 뜨기 무섭게 울려대는 부엌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도마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칼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부비적거리며 잠에서 깨서는 이불 속에서 오늘 도시락 반찬을 상상해 보고는 했다.
엄마의 갈치 조림은 늘 저녁 밥상에 등장했다. 살점이 가득한 갈치를 하얀 쌀밥 위에 올려놓고 먹는 일은 한 두번을 족했다. 우리는 갈치 조림 국물에 푹 익은 무와 감자를 밥 위에 올려놓고 슥슥 비벼 먹으며 밥 한 그릇을 추가하곤 했다. 그것만으로도 진수성찬이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어왔다.
엄마 밥상을 떠올리는 이곳은 제주 천지연폭포 바로 앞에 위치한 장수애섬식당입니다. 내부는 세련되지 않았습니다. 뜬금없이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기도 해요. 둥근 원형 테이블에 소파 같은 의자도 놓여 있습니다. 상상이 되나요? 상상을 해 봅니다. 손님들이 없는 늦은 저녁 홀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며 하루를 마무리하시는 모습을. 갈치 조림이 무척 맛있는 곳이었습니다. 진한 국물이지만 간이 딱 맞았어요. 뜨거운 솥밥을 그릇에 덜어내고 국물에 밥을 슥슥 비벼 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습니다. 두툼한 갈치가 여러마리 들어가 있는 갈치조림은 이곳의 대표 메뉴입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많은 음식들이 메뉴에 있어서 처음에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거에요. 아마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아서 주인장이 할 수 있는 모든 메뉴를 다 올려놓은 건 아닌가 싶습니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고등어 구이도 불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어서 아이들 밥 위에 척척 올려 놓아주면 그 날만큼은 반찬 투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갈치조림 2인에 45,000원입니다. 아이와 함께 3명이 먹어도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길다란 가래떡이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쫀득한 가래떡을 갈치 조림 국물에 찍어 먹으면 이것도 별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