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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견 Jul 19. 2020

고려청자 실사용기

천 년 전 하이테크를 만나다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고려청자 사발하나 발견했다. 군데군데 금이 가고 깨졌다가 수리한 물건이라 가격이 4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깨졌다가 붙인 물건이어도 고려시대 청자가 4만 원이라니. 굳이 가짜 도자기를 저렇게 정성들여 수리하고 싸게 팔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매자 후기도 좋은 평만 가득했고. 속는 셈치고 입찰했다. 과연 나 빼고 입찰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누가 마지막 순간에 천 원을 더 불러서 채갈까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마감을 기다렸다. 역시나 아무런 이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고려청자는 몇 번째인지 모를 새 사용자를 만났다.


 사흘 쯤 뒤에 4천원짜리 착불로 묵직한 택배상자가 하나 왔다. 뽁뽁이와 신문지에 곱게 싸인 도자기. 학창시절 '찬란한 고려 문화유산의 대명사'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그 고려청자가 드디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돌려가면서 찍어보니까 이 각도가 그림이 제일 잘 나온다.
안쪽에 살짝 흠은 있지만 다행히 새는 곳은 없다.

 비색을 띈다고 하기엔 살짝 모자라지만 전체적으로 고르게 잘 발린 푸른 유약. 그릇 안팎으로 예쁘게 난 자글자글한 빙렬. 손으로 하나하나 그린 연꽃잎 무늬. 굽 아래에는 구울 때 그릇이 바닥에 달라붙지 않도록 네 군데에 굵은 모래를 받쳐서 구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손톱으로 살살 두드려 보면 나는 '팅' 소리가 반대편 벽에 청아하게 울린다. 옥에 티를 하나 꼽자면, 이 도자기는 위에서 봤을 때 타원형으로 살짝 일그러져 있다. 벽을 최대한 얇게 만들다 보니 완벽한 원형을 빚어내진 못했으리라. 너비는 가장 긴 부분이 16.9cm, 짧은 쪽이 15.8cm이다. 7cm를 넘지만 8cm엔 약간 모자란 높이. 전형적인 대접 사이즈다. 칼로 연꽃무늬를 새겨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 대접이니 문화재 작명법에 따라 그럴듯한 이름을 짓자면 '청자음각연판문발'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굵은 모래를 빚어 받친 흔적. 바닥에는 가마의 열기에 흠이 났지만, 다행히 깊이 파이진 않았다.

 그렇게 거창한 명칭을 붙이고 보니 '청자음각연판문발'이 왠지 더 빛나 보였다. 대접의 벽면은 굽에서 완만한 곡선으로 위를 향해 비스듬히 올라가다가 맨 위에 다다라서는 지면과 수직으로 섰다. 도공은 물레를 돌리며 벽면을 쌓아가다가 마지막에 입구를 살짝 오므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주 살짝 오므려진 구연부는 전체의 조형에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그릇의 곡면을 따라 그린 연꽃잎무늬도 이 모양새에 잘 어울렸다. 실제 연꽃도 저렇게 살짝 오므라진 꽃잎을 하고 있지 않던가. 재밌게도, 장인이 그릇을 빚은 솜씨에 비하면 그 위에 그려진 연꽃무늬는 다소 서툴렀다. 처음엔 잘 그려나가다가 한 바퀴를 완성할 때쯤 '아차' 했을 것이다. 급하게 채워넣은 마지막 꽃잎은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인간적으로 보였다. 9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제일가는 그릇이었다던 고려청자도, 결국에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 물건이었으니까.

도공이 연꽃잎을 새기다가 공간이 모자라서 수직에 가깝게 그은 것 같다. 하지만 자연의 연꽃잎도 모양은 제각각인걸.

 실컷 감상을 하고 보니, 이제 이 대접으로 마시는 차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졌다. 이걸로 차를 마시면 고려시대의 그 정취를 과연 느낄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을 다잡고, 사용하기 전에 먼저 그릇을 씻었다. 주방세제를 쓰면 왠지 유약이 벗겨질 것만 같아서 손을 덜덜 떨어가며 물로 꼼꼼히 씻었다. 유약이 안 묻은 밑바닥이 황토색인 게 신경쓰였지만, 역시 도자기는 도자기인지라 흙이 묻어나오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물을 한 모금 따라 마셔보았다. 고려의 신선이 된 기분...은커녕 아직 흙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씻기를 세 번. 마침내 흙내가 가셨다.

홍차에도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친구한테 보여줬더니 '사약 비주얼'이란다.

 녹차를 마셔보고 싶었지만 집에 녹차가 없었다. 그래서 일전에 쟁여놓은 홍차 티백을 대신 꺼냈다. 끓는 물을 붓자 얼그레이가 격렬하게 우러났다. 호호 불면서 한 모금 입술을 적셨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가 가라앉았다. 사실 맛은 그냥 찻잔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수백 년 된 대접에 처음으로 홍차라는 게 담겼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을 뿐이다. 마치 30년째 포장지에 싸여 있던 셔츠의 택을 떼어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붉은 찻물이 그릇에 배어 버리기 전에 남은 차를 호로록 마시면서, 청자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는 억지 가득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어쩌면 이 대접은 어느 산사의 고승이 차를 마실 때 쓰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방의 귀족이 아침에 미역국을 먹던 그릇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갔을 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낡은 대접이 지금 내 갈증을 해결해 주고 있다니.

북쪽으로 비장하게 네 번 절하고 마셔야 할 것 같은 모습이긴 하다.

 하지만 청자대접의 감동을 다 느끼고 나니, 그만 몹쓸 상상력이 발동해 버렸다. 고려청자에 홍차를 마셔 봤으니 다른 음료와의 궁합도 알아보고 싶었다. 마침 냉장고에 스텔라 아르투아 한 캔이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맥주를 따랐다. 그런데...

거품의 압박이 심하니 천천히 조심해서 따라야 한다.

딱 500짜리 한 캔이 이렇게 들어간다. 아아. 조상님들의 혜안이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꽉 차 있는 맥주를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마시다 보니 고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고작 네 캔에 만 원짜리 수입맥주나 마시는 데 쓰는 것 같아 약간 죄책감도 들었지만,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누가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격언을 되새기며 고려청자에 담긴 맥주 한 캔을 비웠다. 두 손으로 받쳐들고 마시느라 맥주를 마시는 내내 사약을 받는 듯한 기분이긴 했지만, 잔이 아닌 대접이라 맥주가 공기와 닿는 면이 넓어 향을 느끼기가 더 쉬웠다. 누가 막걸리도 아닌 맥주를 사발에 따라놓고 마실 생각을 하겠냐만은,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혹시나 이런 도자기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이 대접이 진짜가 맞는지, 언제 어떤 용도로 쓰던 그릇인지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대접이 고려시대의 진품이 아니어도 좋다. 천 년 전 고려청자가 지금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듯, 이 그릇도 다음 천 년까지 전해질 수 있을지는 이제부터 하기 나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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