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는 날이 계속되다 보니 온라인 골동품 경매를 구경하는 게 새로운 취미가 됐다. 돈 나갈 구석이 더 생기는 건 안 좋은 일이니까 입찰을 하는 일은 별로 없지만, 아주 좋은 가격에 지나치기 힘든 물건이 나올 땐 유혹에 시달린다. 저평가된 유물의 가치를 나만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특히 그렇다. 얼마 전에도 그런 지름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된 사진을 석 장 샀다. 필름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너무 싼 값에 아무 데서도 못 본 사진을 구한 터라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 석 장은 바로 1949년 한국 축구대표팀의 초창기 역사가 담긴 사진이었다.
그러나 판매자가 단 짧은 주석만으론 이 사진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를 찍은 사진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인터넷에 공개된 1940년대 한국 축구대표팀 사진은 1947년 상해 원정과 1948년 런던 올림픽 정도가 전부였다. 저 사진들이 1949년 사진이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온라인에서도 당시 선수들의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비록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는 당시 경기 출전 명단이 있었지만 생년월일이 적힌 정도가 전부였고, 생년월일조차 없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다행히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와 뉴스뱅크 아카이브를 검색해서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발견했다.
판매자의 설명에는 '1949년 한국축구 제1차 홍콩원정'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박 부회장'의 정체
위 사진이 홍콩 원정경기 모습이라고는 들었지만, 둘 중 어느 쪽이 한국 팀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1948년에 대한민국 팀은 빨간 셔츠에 하얀 바지를 입고 뛰었다고 전해지지만, 양 팀 중 어느 쪽에도 태극기가 달려 있지 않아 한국 팀을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사진을 뒤집어 보니 연필로 쓴 '박 부회장 제1차 향항원정'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다른 사진에도 같은 필체로 '박회장 제1차 막카오 원정'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 걸로 보아, 판매자도 이 메모를 근거로 1949년 축구대표팀 사진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막카오 원정'사진에는 압정 자국이 있었다. '박 회장' 또는 '박 부회장'이 누군가에게 선물한 사진이 오랫동안 어느 벽에 걸려 있다가 이사하면서 매물로 나온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위 사진의 뒷면. '박 부회장' '제1차 향항(홍콩)원정'이란 메모가 보인다.
함께 구매한 다른 사진의 뒷면. '박회장 제1차 막카오 원정'이라 써 있다.
사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박 회장' '박 부회장'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아마도 당시 출전했던 선수나 코치 중 한 명으로 훗날 축구협회나 기타 단체에서 회장이나 부회장을 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한 명일 수도, 두 명일 수도 있었다. 친절하게도, 1948년 11월 25일 자 <동아일보>에서 1949년 '1차 홍콩 원정' 당시 선발된 이들의 명단을 지면에 적어놓고 있었다.
이 중 박 씨 성을 가진 인물은 박규정과 박대종 두 명으로 압축된다. 이 두 이름을 가지고 구글링을 해 보았다. 그러자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광복회 부회장을 지내고 1995년에 돌아가신 '박대종'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 부회장', '박 회장'은 바로 이 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을 소장했던 사람은 박대종 선수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을 것이고 (아마도) 본인에게 직접 사진을 받았거나 사진의 진위를 확인받아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사진들이 70년 넘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왕 찾아본 김에 사진에 나온 선수들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이 시기는 워낙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한국축구의 초창기지만 초라한 성적에 가려져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당대에 활약한 원로들이 길게는 21세기까지 살아남아 증언을 남겼지만, 월드컵 분위기 속에서 짧게 주목받았을 뿐이다. 오늘날 한국 축구 팬 대부분은 이 분들의 일대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당장 열혈 축구팬을 자처하는 나조차도 이 사진을 얻고서야 당시의 선수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박 부회장'의 인생에 대한 옛날 신문자료들을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수비수 박대종, 시위대장의 후예
박대종(1917-1995) 선생은 런던 올림픽에 수비수로 참가한 이래 1953년까지 10회의 공인 국제경기를 치렀다. 신문 검색을 토대로 그의 선수생활을 재구성해 보면, 그는 학창시절엔 2-3-5 포메이션의 레프트 하프(LH: 오늘날 왼쪽 중앙 미드필더)로 뛰다가 국가대표에서는 주로 레프트백(LB)으로 활약한 수비수였다. 그는 무려 36세에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를 치렀는데, 당시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혼란기로 인해 정상급 선수를 길러낼 수 없어 한국 대표팀이 세대교체가 되지 못해 평균연령이 매우 높았다. 당장 저 홍콩 원정에 플레잉코치로 참가한 라이트백 박규정 선생은 5년 뒤 39세의 나이로 선수생활 23년 만에 월드컵 데뷔전을 치르는 기염을 토한다. 한국 축구사에서 이 기록은 아직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영역이며 세계적으로 보아도 매우 드문 케이스다.
20세기 전반의 표준이었던 2-3-5 포메이션(출처: 위키피디아)
당시에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2-3-5 포메이션을 썼다. 박대종 선수는 파란색으로 표시된 왼쪽 풀백(LB)을 맡았는데, 오늘날로 치면 레프트백과 왼쪽 센터백이 나눠 맡는 영역을 혼자 맡아야 하는 상당히 고된 보직이었다. 당대의 경기 영상이 없어 그 전모는 알 수 없지만, 박대종 선수는 상당히 거친 플레이를 즐기는 수비수였던 걸로 보인다. 1939년 11월 26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경기에서 패싸움이 벌어지자 조선축구협회에서는 양 팀 지도자에게 박대종, 민병대 등 "언페어하다고 인정"되는 선수 여섯 명에 대해 "러프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도록 지도하라는 통보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그는 국제경기에서는 반칙으로 인해 물의를 빚거나 퇴장당하는 일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해외여행도 힘들던 시절에 국가대표였으니까 한국의 위상을 위해 친선경기에서 더욱 신사적으로 경기를 하려 노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왼쪽) 1948년 6월 2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박대종 선생. (오른쪽) 1969년 12월 6일자 <동아일보>에 나온 50대의 박대종 선생.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선수생활을 마친 뒤 박대종 선생은 축구심판으로 활약하다가 1960년 아시안컵 준비위원회에서 일했다. 그 뒤 1962년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하고 이듬해부터 대한축구협회 이사로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한 그는 1978년 다시 부회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협회의 적자운영에 책임을 지고 회장 및 다른 임원들과 함께 물러난다. 그 뒤 선생은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광복회 부회장을 지낸 뒤 은퇴했다. 평생 축구인이었던 선생이 독립운동가와 유족들의 단체인 광복회 부회장을 지낸 것은 바로 그가 1907년 군대 해산에 반대하며 자결한 대한제국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1869-1907) 참령의 큰손자였기 때문이다. 박승환 참령은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것을 막지 못하자 무력감을 느껴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당시 군대 해산식이 열린 훈련원 터 옆에는 훗날 박대종 선생이 선수로서 누비게 되는 서울운동장(현재 DDP 자리)이 세워졌다.
박대종 선생의 조부 박승환 참령. 이목구비에 얼핏 닮은 구석이 보인다.
비록 할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존경을 받은 애국지사의 후손으로서 해방된 조국을 대표해 국제경기에 나간다는 건 그에게 매우 영광되고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선수생명이 매우 짧았던 그 시대에, 선수로서는 환갑을 훌쩍 넘긴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해외에 나가는 그 심정을 나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선생이 당시의 감회에 대한 비망록을 남기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전후 사정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그 감동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오래된 흑백사진 뒷면에 적힌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박 부회장'이라는 네 글자 덕분에, 나는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 이름을 들었던 박승환 참령의 손자가 대한민국 축구대표선수로 뛰었다는 사실을 새로이 배웠다. 먹고사는 것마저 어렵던 해방공간에서 전업으로 축구를 하고 또 국제대회에 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초현실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대표선수들은 가슴에 달린 태극기의 무게감을 그 어느 세대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의 첫 승리에 대해서는 수많은 언론사들이 올림픽 때마다, 또 당시 상대였던 멕시코를 국제경기에서 만날 때마다 되풀이하여 보도했기에 들어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또 숙적 일본을 원정에서 꺾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던 역사 또한 축구팬들이 한 번쯤은 들어 봤음직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사이 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일제강점기 조선 각지를 대표했던 선수들이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모여꾸준히 해외에 나갔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비록 1949년 한 해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다음 글에서는 이때의 동남아시아 원정 이야기, 그리고 참가했던 선수들의 이야기를 정보력이 닿는 대로 마저 소개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