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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Feb 08. 2021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 am thinking of ending things (2020)


스포가 많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잘 이해하고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처음 여자의 말처럼 이제 그만 영화에 대한 생각을 끝낼까 해. 끝내고 싶어. 생각들을 하지만...

눈보라 치는 그 밤과 외로운 제이크와, 루시와 루시아를 오가는 많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떠올라

얼마간 그칠 줄 모르는 눈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꽤나 불친절하기도 하면서 또 쉴 새 없이 많은 것들을 끊임없이 던져주고 영화는 끝이 난다.

들여다보든 거기서 끝나든 그건 어차피 영화를 보겠다 선택한 당신의 몫이고, 난해하네 어렵네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인생에 대한 이야기,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데.

난해해 봤자 거기서 거기. 좌절과 기대, 사랑과 후회, 삶과 죽음을 크게 벗어날 인생이 어디 있을까.




루시는 남자 친구 제이크를 기다린다. 함께 제이크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조금씩 눈이 오기 시작하고 루시는 벌써부터 생각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한다고.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런 생각은 한번 찾아오면 내 머리를 계속 지배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늘 그 생각뿐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건 아니다. 새로운 고민인데 동시에 오래된 느낌이다.

언제 시작됐더라? 새롭게 빚어낸 생각이 아니라 오래전에 박혀 있던 거라면? 입 밖에만 내지 않은 거라면?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이란 항상 이런 것인지도.  -첫 장면, 루시의 독백-


Cinemalogue .com


루시 외에 많은 이름을 가진 그녀.
젊은 제이크.


제이크는 빨간 모자에 노란 목도리를 한 루시를 차에 태운다.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이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고 날은 어두워진다.

제이크와 루시의 대화는...

작정해서 집중해 들으려는 나의 이해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몰아치는 눈발만큼이나 여기저기를 누비며 떠다닌다. 누군가 끼어들어 뒤죽박죽, 그리고 끼어든 그의 의식의 흐름대로 이 둘을 조종하며 말하게 하는 것만 같다.

계속 자세를 고쳐 앉는다. 불편하게 만드는 게 그들이 아니고 내 자세인 것 같아.


https://www.nbcnews.com/




quora.com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라고 말하는 루시 외에 많은 이름을 가진 여자와, 노인 제이크


자세를 고쳐 앉을 필요는 없다. 불편한 이유가 분명한 것이 이 모든 뒤죽박죽의 상황을 조종하는 이가 정말 있으니.

노인 제이크, 학교 관리인 제이크.

노인 제이크는 지금 머릿속에 루시와 자신의 젊은 시절 제이크를 설정해 놓고 상상을 하는 중이다.

눈보라 치는 어둠 속 제이크와 루시의 대화가 불편했던 것도, 그녀의 이름이 루시와 루시아와 이본을 오가며 연구원이 되고 화가가 되고 시인이 되었던 것도 다 노인 제이크의 상상 속 변주이다.


노인 제이크는 이제 그만 이 지리하고 외로운 인생을 끝낼까 한다.

그러다 아주 오래전 바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루시인지 루시아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이름을 가졌을 수도 있는 한 여자를, 그의 지리한 생애, 단 한 번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던 작은 사건 하나를 떠올린다.

내가 만약 그녀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만나고 연인이 되어 나의 부모님을 만났더라면 하고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화가일 수도 있고, 시인일 수도 어쩌면 웨이트리스 일수도 있겠지. 입가에 고인 침을 손으로 닦아내는 나의 지저분한 버릇을 분명 경멸할 테고.

이런 상상을 하면서 노인 제이크는 아침을 먹고 tv 보고 학교에 출근을 하고 또 여전히, 이제 그만  외롭고 지리한 인생을 끝낼까 한다.


상상 속에서조차 당신은.


https://www.empireonline.com/


왜 상상 속에서조차 부모님 집이었을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이제는 늙은 그가 살고 있는, 고독과 외로움이 뿌리 박혀 있는 그곳을. 상상일 뿐이라면 더 좋은 곳, 더 좋았던 시절로 데려갈 것이지.  

왜 그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나.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을 수도 있는 여자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도.

부모님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성실과 근면과 통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그의 상상 속에서조차 부모와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녀를 만났어도 제이크는 부모의 모든 시절,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그들 곁에 있었을 테니까.  


영화에 나오는 시처럼, 집으로 가는 길이 매번 고통스러울지라도.

성실과 근면함은 그의 지루하고도 고독한 삶을 여기까지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

정말이지... 외면하고 싶은 힘이었겠다.


상상 속 루시가 제이크의 부모님 집, 사실은 지금 노인제이크가 살고 있는 그곳의 꼭꼭 잠가놓은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한다. 젊은 제이크는 제발 저 지하실에는 들어가지 말라 당부를 한다. 뭐 그리 무서운 거라도, 보지 말아야 할 거라도 숨겨 놓았나 루시는 굳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얼마나 많은 거부와 깊은 상처가 있기에 노인 제이크 당신은, 자신이 온전히 만든 상상 속에서도 그 마음 들여다볼 용기가 서지 않았나. 그런 당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루시가 있는데도. 그래도 그녀는 제법 용기 있게 그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곳에는 들켜야 할 것도, 보고는 놀랄 일도 없는,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모방해 그린 그림 몇 점이 있다. 제이크의 이름이 쓰여 있는.

 

꼭꼭 잠겨 놓은 마음속 깊이에 비해 그리 대단치 않은 것들이 있어 놀라고 그래서 슬프다.

젊은 제이크는 그것들조차 꺼내놓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억압과 눌림의 세월을 살았을 테고. 시간은 흐르고 드러난 건 그림 몇 점 보일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어둠과 아픔과 슬픔이 들어앉은 지하실은  또 얼마나 깊어만 갔을까. 부모는 죽었지만 제이크는 여전히 그곳에 외로움과 고독의 뿌리를 내리며 나오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를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해. 다들 창고 같은 양로원에 보내지. 헌신적인 아들이라는 거 특별한 거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기분이 나아지네.

가끔은... 좋은 일 해도 아무도 못 보는 것 같거든. 나만 혼자인 것처럼.  -루시와 제이크의 대사-


평생을 혼자인 것처럼 살던 제이크는 이제 그만 끝내까 하는 생각을 하는, 곁에는 아무도 없는 아직도 혼자인 고독한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상상 속 루시를 만든다.

루시는 말한다. '나에게 보인다는 건 인정받는 것이다. 난 제이크를 인정하고 살아가게 한다'


그래서 이제 노인 제이크 당신은 어쩔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자꾸 당신이 살기를 바라는데 노인 제이크 당신은 루시에게 말한다. 무엇을 망설이느냐고.

살기를 바라는, 그래서 많이도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건 노인 제이크 당신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결말이 될까.


체인을 달고, 눈보라를 뚫고 운전을 하지만 다시.


https://www.indiewire.com/



상상 속 젊은 제이크와 루시는 부모님 집을 나와 루시의 집에 가기 위해 눈보라가 더 심해진 어두운 밤에 길을 나선다. 만약 젊은 제이크가 체인을 단 차를 타고 눈보라를 뚫고, 다시 루시를 집에 데려다주었다면, 현실의 노인 제이크는 더 이상 ending things를 생각지 않았을까. 별 시덥지 않은 상상을 했구나, 지겹고 외롭지만 또 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니면 노인 제이크는 열심히 체인을 달고 부지런히 운전해 이 어둡고 무서운 눈보라를 해쳐나가 눈이 그친 맑은 하늘을 보고 싶었을까. 루시는 제이크의 부모님 집에서 성가시도록 이 눈보라를 뚫고 어떻게 집에 갈 것인지 걱정을 한다. 젊은 제이크는 걱정하지 말라고, 체인이 있으니 집에 갈 수 있다 안심을 시킨다. 나에게 체인이 있다고, 힘든 여정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게 도와줄 체인이.

우리는 누구나 무서운 눈보라 속에서도 계속 이 눈을 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이 눈이 그칠 것을, 맑은 하늘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바퀴에 체인을 달고 조심히 운전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상상 속에서 젊은 제이크가 체인을 다는 걸 보며 노인 제이크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잠시나마 그의 인생의 끝나지 않는 눈보라 속을 헤쳐나갈 용기를 가졌던 걸까.


갑자기 젊은 제이크는 루시와 함께 자주 다니던 아이스크림집에 가자한다. 그곳의 여점원 하나가 루시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안 가도 돼요. 시간 속에서 앞으로.. 당신은 여기 있어도 돼요. 너무 무서워요.

체인을 달고도 다시 루시의 집이 아닌 학교를 향해 가는 젊은 제이크를 보며 노인 제이크는 점원을 통해 루시에게 부탁하는 것만 같다.

하지 말라고, 지금 내 상상의 시간 속에서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말라고. 노인 제이크는 계속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 제이크를 보고는 두려워 루시를 붙잡아 두려 한다. 노인 제이크의 자아는 계속 싸우고 있다. 끝낼 것인가. 삶을 계속할 것인가.


https://themoviegiant.in/


결국은 학교로 향하는 제이크. 젊은 제이크는 안으로 사라지고 루시는 혼자 학교로 향한다.


인생을 끝낼까 하는 그 시점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 중의 하나가, 노인 제이크에게는 바에서 만난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말을 걸었다면, 하는 만약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된 상상. 현실의 노인 제이크는 머릿속 상상을 넘어 자신 앞에 보이는 루시를 마주하게 된다. 상상과 현실의 분열, 좋지 않은 조짐이다.


남자 친구가 이리로 들어갔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혹시 본 사람 있나요?

남자 친구가 어떻게 생겼죠?

내가 그를 기억이나 하겠어요? 40년 전 한 번 본 나를 상상 속 여기까지 끌고 들어와서는. 사실은 누군지조차 가물가물하다고요. 40년 전, 어느 날 밤중에 물린 모기를 기억할 수 있겠어요? 살면서 스쳐 지나간 수천 명 중의 한 명인 그를.


일그러진 노인 제이크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상상은 깨어지고, 사실은 깨뜨려지고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눈보라가 치고 어둡다.



제이크가 없는 세상.


https://www.cbr.com/


눈보라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학교 앞에는 눈에 뒤덮인 차 한 대가 보인다.

제이크는 더 이상 힘들게 체인을 달지 않아도, 근면과 성실과 통제의 삶을 이어나가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지하실에,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묻을 일도 없다.

안경을 벗고 시계와 옷을 벗고 노인 제이크는 떠났기에.


ending scene에 나오는 저곳은 현실이다.

눈보라가 그치고 날이 밝아온 것 같지만,

현실에 사는 이들에게는 또 언제 눈보라가 칠지 어두워질지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곳.

그래서 저 유난히 밝은 빛에 눈이 시린가 보다.




영화가 끝나고도 처음 나오는 루시의 독백을 몇 번이나 찾아봤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런 생각은 한번 찾아오면 내 머리를 계속 지배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늘 그 생각뿐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건 아니다. 새로운 고민인데 동시에 오래된 느낌이다.

언제 시작됐더라? 새롭게 빚어낸 생각이 아니라 오래전에 박혀 있던 거라면? 입 밖에만 내지 않은 거라면?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끝이란 항상 이런 것인지도.  -첫 장면, 루시의 독백-


그리고 생각했다. 최근에 본 어떤 영화보다 슬픈 영화구나.

이제 그만 끝낼까 해. 그러고는 정말 끝나버린 이야기라서.

또 생각했다. 무슨 말을 이리도 길게 써 내려갔는지에 대해. 답은 여전히 없지만 마음은 가볍다.

좋은 영화라 하기에는 참 이.상.한. 영화.


이제는 정말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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