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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론 Aug 05. 2019

오늘 해낸 일을 모두 적어보세요.

꽤 많은 걸 해낸 하루


'위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삐뚤어진 그동안의 생각이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위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하는 거의 대부분의 말은 상대방에게 와닿지 않는다.


'힘내'라거나 (낼 힘이 없는데?)

'괜찮을거야' (괜찮지 않아서 지금 우울한 거잖아)

'잘 하고 있어' (잘 하고 있는 거면 내 눈 앞의 상황은 왜 벌어진건데?)


괄호 속의 말들이 위로를 튕겨낸다.

나는 그래서 괄호 속 위로를 거부하는 마음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뭔가 연구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내 마음을 좀 더 냉정하게 들여다 봤다는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냉정하게 보기 위한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못하는 가장 큰 환경적 장애물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안한 내 방.

아늑한 내 방에서 고요하게 혼자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아니, 사실 그렇지 않다. 이런 순간에 날 고요하게 혼자 내버려 두는 건 아주 위험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시간들.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날 내던져야 한다.


슬그머니 언니의 방으로 갔다.

세상 모르고 곯아떨어진 언니의 모습. 부럽다 부러워.

웃긴 포즈에 일단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언니 오늘 어디 안 나가?


이 질문은 안전빵이다.

나갈 일정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합류가 가능하고

일정이 없어도 '나갈 일은 없는데, 어디라도 갈까?'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

다행히 언니는 5시에 공연을 보러 잠실에 간다고 한다.

우물우물거리며 "나도 같이 나갈까 그때."하고 말하니 흔쾌히 그러자는 답이 돌아온다.


좋아. 반은 성공이다.

일단 싫으나 좋으나 외출 일정을 만들었고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말은 정신 활동이 독식하고 있던 내 시간에 몸에게도 할 일을 주는 것으로, 비대한 잡생각을 어느정도 떨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나갈 준비를 한다.


잠실에 도착.

시간이 촉박해 언니는 바로 공연을 보러 가고 나는 언니가 알려준 카페로 향한다.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시원한, 너무 핫해보이지 않는(이거 중요) 단정한 카페.

대강 자리를 잡고 커피를 시킨다.

인정하긴 싫지만 카페인 의존이 심해 커피를 마시고 안 마시고에 따라 심리 상태가 오락가락한다.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쾅 내려놓은 뒤 밍기적밍기적 다이어리를 꺼낸다.


뭐하지?


읽을 책, 그림 그릴 연습장, 일기용 다이어리까지 챙겨왔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이럴 땐 딴짓이지.

조용히 유튜브를 켜고 현실도피적 시간을 보낸다.

하하하. 재밌다.

이미 본 웃긴 영상, 보고 또 본 그닥 안 웃긴 영상을 보며 영혼없는 미소를 짓는다.

시간이 한참 흐르니 조바심이 든다.

아니, 마음을 들여다 본다면서?


형식적으로 노트를 펴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

펜이 종이에 닿아 뭐든 그리고 쓰기 시작하면 정신이 이쪽으로 돌아온다.

이 순간까지, 오늘 내가 해낸 일들을 적어본다.

나는 지금 우울하니까 나를 칭찬해주기 위함이다.


실제 다이어리에 적은 글


손톱을 깎고,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언니를 따라 잠실까지 와 카페에 앉아 해낸 일을 적은 것.

이 모든 일을 내가 오늘 해냈다.

그리고 지금 이 일기까지 제대로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쓰고 있으니까

저번달 우울주기보다 장족의 발전이다.


웃긴 것을 발견했는데,

다이어리의 먼슬리, 위클리를 살펴보니 대략 매 달 이 주간쯤 또옥같은 감정을 느꼈고 그걸 적었더라.

생리 전인가, 우울하다.

나는 왜 이럴까.

이런 말들이 뻔할 뻔자처럼 반복돼서 읽으면서 내가 불쌍했다.

'너는 1년의 4분의 1을 이런 기분으로 보내고 있냐...'


그렇지만 이번 주간은 조금 다르다.

일단 어제의 '일기 안 쓰는 날의 일기'로 내 기분에 대해 가시화해 기록하기 시작했다. 자세하게.

또 오늘의 용기있는 행보로 나 자신을 도닥이기 위한 시도 또한 시작했다.

아주 장하다 장해.

이럴 땐 무조건 칭찬해줘야 한다. 엉덩이도 스스로 팡팡 두들겨줘야 한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내일은 긍정맨도 미간이 찌푸려질 수 있는 월요일이다.

이럴 땐 치과에 가기 싫어하는 애를 구슬리듯이 마음을 살살 꾀어내야 한다.


("가서 너무 아플 것 같으면 엄마랑 집에 오자. 그럼 됐지?"의 톤으로)

'정 괴로우면 반차 내'


이건 마법의 문장으로, 연차가 남은 경우에만 쓸 수 있지만 효과가 꽤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출근의 두려움이 약 20% 감소하고 반차 낸 오후를 생각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래놓고 가서는 반차를 안 쓸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일단은 회사로 갈 용기를 주는 것이다.

아이는 여차하면 집에 올 수 있다는 마음으로 치과에 가지만 (결과는)끔찍하게 아픈 치료를 받게 되고

나도 여차하면 반차를 쓸 수 있다는 마음으로 회사에 가지만 (결과는)내지 못하고 저녁까지 버텨내게 된다.


어제와 오늘, 내일까지

우울 주간의 경계 태세는 늦추지 않는다.

오늘도 잘 해냈어 나 자신!

내일도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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