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래 디자이너의 역할과 생존전략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얼마 전 진행한 세미나에서 나 또한 미래의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언급했지만 최근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을 보면 극 예민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뭔가 꿈틀대고 있구나… 변화의 분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직 본인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아서인지 다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하던대로 일을 하고 있고, 그 중 일부는 뭐 안되면 은퇴해야지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버렛 로저스(Everett M. Rogers) 교수가 혁신의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이란 책에서 언급했던 소비자의 5가지 유형—이노베이터(Innovators), 얼리 어답터(Early Adaptors), 얼리 머저리티(Early Majority), 레이트 머저리티(Late Majority), 래거즈(Laggards)—정도로 지금의 변화를 ‘얼리 어답터가 아니면 어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이미 저 깊은 온라인 바다 밑에서는 화산 폭발과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잔잔해 보이지만 조만간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올 수 있다.
음악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친구가 운영하는 TMI(Tomorrow of the Music Industry) 레터에서 ‘음악 산업의 내일’에 대해 ‘조만간 음악, 영화,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의 경계가 흐려질 것이다.’라고 쓴 글을 보았다. 경계의 사라짐은 음악만이 아니다. 아직 UX/UI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업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고, 이미 불고 지나간 곳도 있으리라. 그런 차원에서 지난달 말부터 새로운 프로젝트 하나를 기획해서 진행하고 있다. 일명 COS, Crossover Seminar의 줄임말인데, 내가 지었지만 작명 참 멋지구나… 스스로 딱 3초 감탄하다가 문득 모 패션 브랜드명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냅따 구글링을 해보았는데 Collection of Style, 줄임말은 동일해도 내포한 뜻은 달라요!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COS를 기획하고 추진하게 된 두 가지 이유는 쓰나미가 몰려오기 직전인 변화의 시대에 우선은 나 스스로가 중심을 잘 잡고 파도를 잘 타면서 나아가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후배들 또한 그들만의 파도타기 노하우를 잘 만들어갈 수 있도록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크로스오버의 의미는 작게는 UX, UI 디자인의 경계를 허물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특정 장르, 특정 카테고리에 귀속되는 것이 아닌 경계를 넘나들며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가 되자는 취지에서 시작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가지 타이틀로 불려져왔고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타이틀이 그닥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될 것이고,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과거의 방식으로 일하다가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무덤을 내가 파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경계를 허물면 된다. 그래서 나는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카테고리로 설명되지 않는 애매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우선 그동안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려 한다. 그런데… 발자취를 돌아보니 회고가 한번에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오늘 모든 이야기 보따리를 다 풀지 못하더라도 우리에겐 내일이 있잖아요?
많은 사람들의 시작이 그러했을 것이다. 웹디자이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타이틀이다. 그러다 누군가는 기획자가 되고 누군가는 웹디자이너로 남았다. 기획자라는 이름은 세기를 넘나들며 꽤 오래도록 불려지고 있는 타이틀 중 하나다. 지금, 2024년에도 견적서에 수행계획서에, 온갖 문서에 기획자로 도배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2013년 무렵인 것 같다. 갑자기 서비스 디자인 열풍이 불면서 잠시 나는 서비스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러다 글로벌한 시류를 타면서 UX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사실 지금은 그닥 뭐라 불리우던 그닥 신경쓰지 않는다. 직장인이다 보니 사내에서 불리는 직급(돌맹이님)도 있고, 프로젝트에 나가면 불리는 직책(피하고싶은님)도 있고, 회사생활 좀 오래하다보니 권력자 대열에 끼어 불리는 타이틀(응~짱님)도 있지만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불리우고 싶은 타이틀은’ 디자이너’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랜만에 세미나에 갔다가 유훈식 교수님이 정의한 디자이너의 역할 재정의를 보면 또다른 관점에서 변화하고 있는 업의 흐름이 보인다.
UX 컨설턴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럴듯한 키워드와 비현실적인 전략에 발목이 잡혀있지는 않은지, UX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PPT로만 그리는 화면설계에 발목이 잡혀있지는 않은지, UI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예쁜 비주얼에만 발목 잡혀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시간이다. 이미 시장에는 UXC, UXR, UXD, UID의 역할을 겸비한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디자이너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고, 피그마와 각종 AI 툴이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UX/UI도 제대로 하려면 갈 길이 멀었는데 이 모든 것을 다 섭렵한 만능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라니 이게 왠 말이냐 싶겠지만 ‘각성’하지 않으면 쓰나미에 휩쓸려갈지도 모를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뭐라 부르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미래의 디자이너, 꿈도 꾸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사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고정관념의 틀을 깨는 오늘,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의 폭을 넓혀 가는 오늘, 여러 분야의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오늘, 이러한 오늘이 모여 단단하지만 유연한 나를 만들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논리화하고 연결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일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보지 말자구요.
첫발만 떼어봅시다. 사~알~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