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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Jan 10. 2019

한국인의 습관이 위험해질 때

서글픈 숙제, 미국화 되기

사진출처: 구글이미지


미국 소도시의 초등학교가 주관하는 다문화 행사의 밤. 한국 여자 셋이 진땀을 빼가며 연습한 부채춤은 그럭저럭 먹혔다. 한복과 부채의 화려함이 허술한 춤사위를 커버해 준 덕이었을 거다. 초등학교 행사가 이만하면 됐지 뭐. 박수와 환호가 빈약하지 않아 체면도 섰다.


내가 무대에 올라 춤을 추다니! 행사를 주관한 학부모 대표가 나와 가까이 지내는 엄마였던 터, 그녀가 직접 연락을 해서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차마 거부할 수 없어 떠맡듯 벌인 일이었다. 하고 보니 잘했다 싶긴 했다. 미국 엄마들의 말빨에 주눅 드는 게 싫어 학부모 회의 같은 행사는 죄 피하고 있던 터였다. 동시에 엄마 노릇 잘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늘 찜찜했는데, 부채춤이라는 ‘엄청난’ 용기의 결과물이 이민 1세 부모의 자격지심을 잠시나마 덜어줬다고 할까.


부채춤을 끝낸 우리 팀이 무대 옆 통로를 따라 걸어 내려오는 동안, 옆에서는 다음 번 순서의 공연을 위해 한 무리의 여자 아이들이 무대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이들 무리의 맨 끝에 따라오는 인솔자가 우리 동네에 사는 한 아이의 엄마 J였다. 그런데 J와 눈인사를 나누고 있던 중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오 노…….


나의 부탁으로 행사에 참여하게 된 지인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녀가 없었다. 그녀가 미국에 와 상대하는 사람들은 한인 교회에 나가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런 그녀가, 곁을 지나가는 한 꼬마를 보더니 ‘어머 귀여워라’ 하는 감탄사와 함께(아이가 무척 귀엽긴 했다) 아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린 것이다. 톡톡톡.


무대로 가던 상황이라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던 아이가 가면서 뒤를 돌아봤고, 방금 벌어진 일이 어리둥절해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아이를 보던 내 시선이 반사적으로 인솔자인 J에게로 옮겨갔다. 아니나 다를까. J의 휘둥그레진 눈과 떡 벌어진 입. 이윽고 J는 내 지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내 지인은 자신이 뭘 한 건지도, 누군가 자길 노려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한복 치맛자락을 풀썩이며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J의 눈과 내 눈이 다시 마주쳤다. 배운 것을 발휘해 내 몫을 해야 할 때였다. 행사에 지인을 불러들인 건 나니까. 양 팔을 벌리며 손바닥은 상공을 향하게 하고 어깨를 들썩 들어 올렸다 내렸다. 비굴한 미소에 난처해하는 울상을 섞어 고개를 저었다. 십년 넘게 배워 습득한 미국식 제스처 신공에 눈빛 메시지를 곁들였다.


‘방금 보신 그거, 유아 추행 이런 거 아니랍니다. 저 분, 여기 정서 잘 몰라요. 그러니 제발…….’   


‘우주의 기운’을 모두 끌어 모아 던진 나의 텔레파시를 읽은 걸까. 떨떠름하나마 J의 표정이 겨우 풀어지긴 했다. 휴우우. 간신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남에게, 특히 아이들에게는 웬만하면 신체 접촉을 하면 안 된다고 지인에게 말해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먼저 와 살았다는 이유로 ‘미국에서는’을 서두에 놓고 이러쿵저러쿵 조언하는 걸 대개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살다보면 저 사람도 알게 되겠지 뭐.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나의 일부가 ‘미국화’되고 있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가끔 가게 되는 한인 타운 내 마트나 식당에서도 그런 걸 느끼고(한인 타운에 살면 영어는 거의 하지 않아도 되고, 미국인들과 대화할 일도 거의 없어 미국 내에 살아도 다른 문화권에서 산다고 봐야 한다), 한국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도 그렇다.


<한끼줍쇼>에 효리가 출연했을 때다. 이경규가 길에서 만난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덕담을 건네자 효리가 이경규에 반박하면서 아이를 향해 ‘아무나’되도 된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분명 효리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멋진 장면인데도 내 눈은 아이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 효리의 손에 집중하고 있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남의 신체에 손대는 걸 경계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살다보니 그 장면이 새삼 생경하게 느껴진 거다.


강호동이 들어가게 된 어떤 집에서 그 집의 어린 딸에게 뽀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걸 보고는 경악했다. 미국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방송에 나오는 게 신기했다. 예능 프로 패널들이나 게스트들이 옆 사람을 때리면서 박장대소하는 장면이나 웃긴 장면을 연출하느라 상대를 잡고 흔드는 장면 등을 볼 때도 몸이 움찔한다. 미국에 사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하나씩 하나씩 배우고 주의하던 것들이 어느새 내 습관과 의식에 내재화되어 미국식 시선으로 한국인들의 행동을 느끼고 있는 거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 미국 엄마들과 만나 아이들을 놀리다 보면 내가 보기에는 유난하다 싶은 것들이 종종 있었다. 그중 하나가 ‘Hands on yourself!’ 라는 말로 주의를 주는 것인데, 한국말로 하자면 ‘손 제자리로!’ 쯤 되는 의미의 말. 미국 엄마들은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손을 뻗는 동작을 발견하면 당장에 ‘Hands on yourself’라는 말로 제지하곤 했다. 때리거나 위협을 가하는 의도가 아닌, 호의로 하는 행동일 때조차 그러는 게 호들갑스러워 보였지만 나 역시도 내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면서 키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까.


그런데 미국에서 사는 동안 목격하게 된 다양한 케이스의 사건 사례에 미국인들이 어떻게 사안을 대하고 처리하는지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엄마들의 유난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이해하게 됐다. 의도가 뭐든 간에 남의 신체를 건드렸다가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남을 만지는 습관은 원천봉쇄해야 하는 거였다. 한 마디로 말해, 소송이 많아 타인을 잘 믿지 않는 미국인의 정서에서 비롯된 자식 보호 방법인 거다.  


얼마 전 미국 내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중 남편이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면서 조언을 구하는 내용이 있었다. 글쓴이의 남편이 업무와 관련해 동료 직원 하나와 언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화를 내며 휙 돌아서 가버리려는 동료 직원을 급한 마음에 돌려세운다는 게 상대의 셔츠 허리춤 쪽을 잡은 게 문제가 되었다고. 더욱 분노하게 된 동료 직원이 사내 HR로 곧장 가서 보고를 한 즉, 게이인 자신을 모욕한 추행이라고 ‘여겨진다’며 문제 삼은 거였다.


어쨌든 해고는 좀 과한 처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어떤 댓글들이 달렸나 읽어봤다. 행위를 한 사람의 의도가 뭐든 간에 그 행위의 사실 여부만 밝혀지면 대개 해고를 하는 게 일반적인 거라는 댓글이 많았다. 옷 한 번 잡았다고 남의 밥줄을 끊다니. 보고한 동료 직원이나 회사나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 나라에서 사는 룰이 그렇다니 알아두고 조심하는 수밖에.


예전에 미중부 지역의 한 소도시에서 살 때의 일이다. 큰 대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타운이라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와서 체류하다가 떠나는 한국 교수들이 꽤 되었다. 아빠를 따라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된 한 아이가 한국에서 가끔 하던 버릇대로 미국 아이에게 ‘똥침’을 날린 사건이 벌어져 해당 학교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부모가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타 문화권에서 온 아이의 미숙함에서 온 실수였다는 게 참작이 되어 큰 벌은 면했다고 들었다. 학교 측에서는 얼마나 황당해했을 거며, 당한 아이의 부모가 얼마나 난리를 쳤을지 불 보듯 뻔해 들으면서 아찔했다. 사실 부모들의 입김이 센 사립학교 같은 경우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퇴학감이다.  


한국에 사는 시조카가 6학년이었을 때 미국에서 여름 캠프를 하겠다고 방학 동안 우리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한동안 미국의 친척집에 자녀들을 보내 여름 캠프를 보내는 게 유행인 때가 있었다. 조카가 와있는 동안 우리 동네의 연례행사인 바비큐 파티가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던 중 무심코 보니 조카가 머리에 무려 일곱 개쯤 되는 야구 모자를 겹쳐 쓴 채 뛰어다니고 있었다. 개구쟁이인 조카가 동네 아이들의 머리에서 모자를 낚아채 도망 다니는 장난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당한 아이들이 표정이 가관이었다. 같은 장난을 하며 시시덕대면 또 모르겠는데 다들 몹시 어이없고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는 남의 몸에 부착되어 있는 것을 억지로 벗겨내는 장난 같은 것을 하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아이들로서는 처음 겪는 기이한 상황인 거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얼른 다 돌려주라고 타일렀지만, 조카아이는 뭐 이만한 장난에 외숙모가 저리 식겁을 하나 시답잖아 하는 태도였다. 조카아이를 설득해 동네 아이들에게 모자를 되돌려주느라 애를 먹고 나니 그 뒤로는 조카아이의 행적을 쫓는데 정신이 팔려 파티고 뭐고 뒷전이었다.


매사에 이런 사소한 것들을 주의하고 체득해나가려고 애쓰며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신경이 뾰족해 질 때가 있다. 가끔씩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묘하게 거슬리는 것들이 있고,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상대방이 납득하지 못하는 말을 해 싸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한다. 제 뿌리를 망각하고 ‘미쿡’스럽게 구는 교포 특유의 밥맛없음으로 보일까봐 주의를 한다고는 해도 별 수 없을 때가 있는 거다.


2001년 1월부터 미국에 살기 시작했으니 그 세월이 벌써 열여덟 해. 그만큼 나도 변했고, 한국에 있는 사람들도 내 기억이 멈춰있는 2001년과는 달라진 게 당연지사. 내가 미국인들 틈에서 흠 잡히지 않으려고 분투하며 사는 동안 내가 기억하는 한국과 현재의 한국 사이에 블랙홀이 생겨버린 거다. 그 블랙홀 안에 내가 잃어버린 유실물들이 빨려 들어가 있는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속에서 끈끈하게 엉겨 붙어 있어 종종 불거져나오는 것들이 있다. 떠나온 곳에 있는 내 사람들과 나와의 격차를 발견할 때마다 씁쓸해지는 마음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의식의 습관이랄까.


아는 집 아이의 악기 연주를 보고난 후였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워낙 연습을 많이 한다는 걸 알기에 남의 자식이지만 대견했다. 원래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유독 연주를 보고 흥분을 잘 한다. 리사이틀이 끝난 후 마련된 작은 파티. 사람들에 둘러싸여 찬사를 받고 있는 그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내 감동을 표현해 아이를 격려하고 싶었다.


헌데 아이와 나와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곱슬거리는 금발이 늘어뜨려진 아이의 등쪽으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한국식 등 두들겨주기 바디랭귀지가 난데없이 튀어나올 뻔한 거다. 그만큼 내가 그 아이의 연주에 감동을 했던 거겠지. 다행히 이성의 콘트롤이 작동해 손이 아이의 등에 닿기 전에 동작이 정지되고 손가락을 오므렸지만 어쩐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잘하니?’ 감탄사를 터뜨리며 등을 두들겨줘야만 내 진심이 완벽하게 전달되는 칭찬인 것만 같은 걸.


이곳에서 살아내기 위해 나의 일부를 이른바 Americanize 하겠다고 애쓰며 지내온 세월. 집밖을 나가는 순간 실수하지 않기 위해 정신 바짝 차리고 노력해도 가끔씩 몰라서, 또는 알아도 습관 때문에  저지르게 되는 실수들이 있다. 그로 인해 별 것 아닌 일이 큰 일이 되기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더러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국화 시키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친척 어른들이나 엄마 친구들이 별 것도 아닌 걸 칭찬해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주던 따스한 기억, 밥만 맛있게 먹어도 세상 착한 아이로 취급해주며 궁둥이를 두들겨주던 할머니의 손길. 사랑받고 있다는 만족감을 심어줬던 그 손맛들을 과연 지워야 하는 것일까. 그걸 지워야 얻을 수 있는 게 미국화라면 그건 서글픈 일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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