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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Dec 24. 2018

그때의 푸른 눈동자에게

마음 속 깊은 물 아래로

사진 출처: 구글이미지


서울의 골목길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도시의 주택가 골목길들이 으레 그렇듯 버스정류장과 육교가 있는 큰길에서 뻗어 들어온 가지 길로, 제과점, 문방구, 서점, 구멍가게 같은 상점들을 하나씩 지나쳐 걸어 들어가게 되어있는 흔한 골목길이었다. 그 동네 이전과 이후, 다른 곳들에도 살아봤지만 어린 시절을 더듬을 때면 반사적으로 그 골목길이 떠오른다.


동경하던 노란색 단체 가방을 메고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 산타클로스에게 호명되어 무대에 올라 선물꾸러미를 받아본 것, 손수건과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간 것 같은, 그 또래 인생의 빅 이벤트가 다 그 동네에 살 때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 즈음이 성장기의 기억에 악센트로 남아있는 게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


서울에서도 시골스럽게 살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정서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 집은 골목길에서도 안쪽으로 한 번 더 꺾여 들어와 집 네 채가 ‘ㄷ’자 형으로 모여 지어진 구조 안에 속해 있었는데, 오목하게 들어와 있는 길의 특성 상 동네 아이들은 그 안에서 우글우글 모여 놀곤 했다.


언제인지 모르게 그 가운데 평상이 하나 놓이고, 춥지 않은 날이면 동네 아줌마들이 채소 같은 걸 가지고 나와 그 평상에 모여 앉아 다듬으며 수다 욕구를 풀었다. 여름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수박이나 찐 옥수수 같은 것을 평상에 풀어놓고 이웃들에게 선심을 쓰는 관례가 생겼는데, 그런 날이면 아이들도 한껏 신이 나서 손에 쥔 수박을 베어 먹으며 달빛 아래서 뛰어놀곤 했다. 깨끗이 씻겨 잠옷까지 입혀 놨더니만 도로 땀범벅이 된다고 아이들을 향해 혀를 차면서도, 어른들 중 그 누구도 여름밤의 평상 파티가 주는 흥을 깨려 하진 않았다.


어린 시절의 행복이란 소박하고도 평범한 것들에서 비롯된다는 걸 다시금 일깨워주는 추억인 건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따금씩 그 장면들 속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그 기억만 지워버린다면. 평온하고 밝았던 사람들의 무심함 바깥쪽에서 눈물 흘리고 있었을 한 아이에 대한 기억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너, 걔 봤어?”


그 맘 때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놀던 친구가 말했다. 얼마 전부터 눈이 파란 도깨비 같은 아이가 가끔 우리 골목에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컬러 티브이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이전이었다. 파란 눈이라니. 친구가 말을 지어내고 있을 게 뻔했다. 만일 친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도깨비거나 괴물일 터였다. 내가 그렇게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갈 바보는 아니지 않나.


“거짓말. 눈이 어떻게 파란 색일 수가 있어?”


하지만 ‘파란 눈의 도깨비’가 내 눈 앞에도 실제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골목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여자 아이들끼리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며 놀고 있었을 때인데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만치 떨어진 골목 어귀에서 뛰어놀던 남자 아이들 쪽이었다. 남자 아이들이 뭔가를 둘러싼 채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며 시끌벅적해 있는 것이었다. 조금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무슨 일일까 호기심도 생겨서 가까이 가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친구가 속닥거렸다.


“저기 왔다!”


함께 놀고 있던 여자 애들이 모두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군중심리에 힘입어 나도 남자 아이들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존재를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친구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나보다 두어 살 쯤 어린 아이의 몸집. ‘도깨비’는 얼핏 그 또래의 보통 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시 유행하던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아시아계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으니까.


이상한 건 그 평범한 스타일의 머리카락에서 붉은 빛이 감돌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눈이었다. 쌍꺼풀 없이 가느다란, 내 눈과 똑같이 생긴 그 눈이 정말로 새파랬다. 파란색 크레파스처럼. 외국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거니와, 원더우먼이나 수퍼맨 같은 외화 속 서양인들 역시 흑백 모니터로만 본 게 전부였으므로 나는 지구촌 사람들의 눈동자 색이 여러 가지 빛깔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공포에 사로잡혀 굳어버린 나는 저 파란 눈동자의 도깨비가 뒷전에 서서 구경하고 있는 나를 향해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떨었다. ‘도깨비’는 어떻게든 골목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서성대고 있었고, 남자 아이들은 전부 막대기 같은 걸 하나씩 손에 들고 도깨비를 쿡쿡 찔러대거나 막대기 끝을 도깨비의 배에다 대고 힘껏 누르면서 골목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처럼 공포에 질려있는 여자 애들이 있는가 하면, 남자 아이들에게 응원을 실어주느라 열띤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 애들도 있었다.


골목 아이들 전체가 하나의 도깨비를 대적하느라 아우성을 치고 있는 그 풍경은 사십년을 거슬러온 기억이므로 완전히 선명하지는 않다.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군데군데 스크래치가 나고 지지직거리는 오래 전의 흑백 필름처럼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바랜 구석 하나 없이 내 기억에 보존되고 있는 건 그 아몬드 모양의 눈 속에 박힌 새파란 눈동자와 그 언저리에 고여 있었던 물기다. 골목 아이들의 결사적인 저항을 뚫고서라도 어떻게든 또래 집단에 들어와 보려고 버티던 파란 눈동자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면서 퇴장하고 말았다. 골목 아이들의 승리였다. 언제 도깨비가 나타났었냐는 양 골목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어떤 기억은 한참동안을 막 뒤에 숨어 죽은 듯 잠자고 있기도 한다. 성장하는 동안의 인간은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집중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더듬이를 세우는데 힘을 쏟는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마음 한 쪽을 내주기 시작하면 나이 들어가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나. 파란 눈동자의 도깨비에 관한 일화도 한참 동안 막이 드리워진 채 기억의 뒤편에 물러나 있었다.  


유학 시절 초반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의 일이다. 볼 일이 있어 그 소도시에서도 꽤 외곽으로 나가 버스를 타야했던 일이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날 보고는 휘둥그레진 눈과 맞닥뜨려야 했다. 버스에는 승객이 드문드문 있었고, 그 중 한 좌석에 앉아있던 꼬마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였는데, 꼬마의 눈이 어찌나 놀란 빛을 담고 있는지 아무리 모르는 척을 하려해도 얼굴이 따가웠다.


아이의 엄마가 내게 꽂혀있는 자기 아이의 시선을 도중에 발견하고는 속닥거리며 주의를 주는 것 같았지만 아이의 호기심까지는 어쩌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의 손에 의해 아이의 고개 방향은 돌아갔지만 눈만은 계속 내 쪽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난 성인이었으므로 그걸로 마음이 다치지는 않았으나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내 생김새가 서양 사람들 속에서 그토록 별나게 보인다는 것을 아이의 솔직한 눈길을 통해 절감한 거니까.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을 해 일을 하다가 다시 해외로 나오게 됐다. 외국에서 사는 게 운명인 건지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거다. 보스턴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취업을 하게 된 남편의 첫 직장은 중부 지역인 미시건 주의 작은 소도시였다. 미국의 중부 지역은 백인 인구가 주를 이루는 곳이 많다. 어디를 가든 금발이 다수인 곳에서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집에만 있어야 하는 신생아기를 벗어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든 내 아이는 유일한 아시아계였다. 마음 한구석 조마조마한 마음이 싹텄다. 혹시 내 아이가 다르게 생겨서 겪게 되는 서러운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까. 자기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를 돌본다는 건 안 그래도 매사에 눈을 뗄 수가 없는데, 나의 경우는 촉을 세우고 지켜봐야할 부분이 하나 더 가중된 셈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각각 만 15세, 12세인 나의 두 아이들 모두 가끔씩 받는 상처를 피하지 못하고 자랐다. 아니, 자라고 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주기도 하면서 성장한다. 흠결 하나 없이 자랄 방법이란 없고, 또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상처를 통해 내성을 키우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 문제와 관련해 아이들이 마음을 다치고 오면 부모로서 미안하다. 내 아이들이 아시아인이 소수가 되어버리는 집단 속에서 자라게 된 상황은 전적으로 부모에 의한 거니까.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쁘지 않다. 혹 선하지는 않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매너는 습득한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가끔씩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무지로 인한 공격에는 속수무책 당하게 된다. 교육받지 않아서, 경험해 본 바가 아니라서, 상처가 될 줄 모르고 내뱉는 동심의 무자비함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작은 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을 거다. 이웃집 아이와 함께 우리 집 차고 진입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놔두고 잠시 집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음료를 가지러 갔거나 얼른 처리할 일이 있었거나 했겠지. 아이를 체크하느라 도중에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봤는데 어째선지 아이가 건너편 집 앞에 가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기보다 대여섯 살은 더 나이를 먹었을 덩치 큰 남자 아이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나머지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가 아이를 불렀다. 무슨 짓이냐고 야단을 치려던 중이었다. 그런데 내 목소리를 듣고 집 쪽을 돌아본 아이가 얼굴을 실룩실룩거리더니 내게로 걸어오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 아닌가. 걸어오는 아이의 뒤에는 발길질 당한 아이를 포함한 네다섯 명의 중학생 남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발길질을 당한 아이도 그렇지만, 농구 골대에 볼을 던져 넣으며 슬렁슬렁 놀고 있는 아이도, 잔디밭에 주저 앉아있는 나머지 두어 명의 아이들도, 방금 벌어진 해프닝이 우습기만 하다는 듯 킬킬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덩치가 어른 맞먹는 미국 청소년들이니 그깟 다섯 살 박이가 차대는 발길질이야 아프지도 않고 같잖아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내 앞으로 온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이가 꺽꺽거리다 울부짖었다.


“나한테 자꾸 중국말을 해보라고 하잖아! 중국말 모른다고 하는데도 계속!”


어떤 상황인지 한 눈에 그림이 그려졌다. 물론 큰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상황에서 당하고 와 눈물짓던 큰 아이의 경험들, 내 눈앞에서 벌어졌지만 어어 하다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와 뒤늦게 후회했던 일들의 기억이 겹쳐 떠오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열이 퍼지는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면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고작 철없는 중학생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내가 다가가 서자 잔디 위에 늘어져 있던 아이들이 눈을 흘끔 치떴다.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기색들이었다. 아이들 얼굴을 훑으며 말했다.


“니들 아까 쟤한테 중국 말 좀 해보라고 했다면서?”


잔디 위에서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있던 아이 하나가 팔꿈치를 땅에 괸 상태로 눈을 들었다.


“제가 그랬는데요.”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의문이 담겨있었다.


“그래? 너 중국 말 할 줄 아나 보구나.”


아이가 뭔 황당한 말이냐는 듯 대꾸했다.


“아뇨?”


“그런데 왜 쟤한테는 중국말을 해보라고 했어?”


“아 그거야 왜냐하면…….”


아이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야 물을 것도 없지 않느냐는 표정, 그것이 말을 하던 중 어느 한 순간 사라졌다. 아이의 건들거리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는 게 보였다. 아이가 자세를 고치더니 황급히 말했다.


“죄송해요.”


아이는 그때서야 상황 파악이 된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매뉴얼,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타인을 인종으로 지칭해서 말하면 안 되고, 함부로 ‘타종’으로 취급했다가는 된통 당한다는 사실. 그것을 ‘왜냐하면’의 뒤에 이어붙일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다행히’ 알아차린 거였다.


‘왜냐하면…… 쟤는 우리랑은 다르게 생긴 아시아인이니까요.’


미국에서는 이런 말을 학교에서 했다 하면 적어도 근신이고, 엄하게는 정학 처분까지도 받을 수 있다. 학생이니까 봐줘서 그 정도지 직장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해고감이다. 물론 들은 당사자가 문제를 삼느냐 안 삼느냐에 따라 사태의 판도가 달라지긴 한다. 당사자가 눈 감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불쾌하게 여겨 사내 HR에 공식 보고를 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법률대리인이 소환돼 사실 관계 조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대개는 발언한 당사자가 해고되는 것으로 처리된다.


피해 당사자가 회사 측이 가해자를 감싼다고 여겨 소송을 걸게 되면 그야말로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싹을 잘라버리는 거다. 회사가 소송에 져서 막대한 피해보상액을 지급하느니 직원 하나 잘라내 버리는 것이 손익 계산을 따졌을 때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설령 회사가 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이런 일로 조명을 받게 되면 회사 이미지가 실추하기 때문에 역시 좋을 게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소송이 빈번한 미국의 특성 상 생겨난 시스템에 의한 것이지 미국에 거주하는 각 인종의 진짜 속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다른 인종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 이 나라에 사는 이상 지키고 살아야 하는 외적 질서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은 교육 기관에 소속되는 유년기가 시작되는 동시에 이 문제에 관해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자란다. 민감한 만큼 들쑤셔지면 난리가 나고, 그렇기 때문에 엄격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말하자면 ‘다수’와 다른 생김새의 꼬마 하나가 골목에서 놀고 있는 걸 보고 그냥 ‘재미’로 한 번 놀려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 때, 아이들은 그것이 내가 학교에서 배운 매뉴얼이 적용되는 상황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철부지 아이들이니까. 상대가 그로 인해 얼마나 상처 받는지 모르는.


겁먹은 중학생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도 숨을 골랐다. 기분이 침착하지 않을 때 튀어나오는 엉터리 영어로 체통을 잃지 않으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아이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속으로는 피눈물이 흐르지만 어차피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상 부모도 아이도 단단해져야 한다. 그래도 한 마디 말은 해줘야 하리라. 지금은 철이 없어 그랬지만 언젠가는 어엿하고 성숙한 청년들로 자라있을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알릴 건 알리고 싶었다.


“쟤도 너희들과 똑같이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야. 그리고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선대의 누군가가 이 땅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미국인이 된 거야. 다 같은 입장이지.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으로 타인을 놀려선 안 된다는 거 학교에서 배웠을 텐데 다음부터는 그런 일 없도록 해라.”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들처럼 기가 죽어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그냥 그 자리를 뜰까 하다가 한 마디 더 했다. 상대가 아무리 아이들이라도 내 분을 조금은 풀고 싶었다.


“그리고 아시아에는 중국이라는 나라 하나만 있는 게 아니란다. 공부들도 좀 하지 그러니? 중학생 정도 되면 그쯤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어린 시절 골목길의 그 아이가 다시 생각난 건 그날 밤이었다.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고, 낮에 있었던 일로 열기가 오르락내리락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난 후였던 것 같다. 또래 아이들과 놀고 싶어 골목길을 기웃거리던 푸른 눈동자에 고였던 눈물. 그 눈물이 그날 내 아이가 흘렸던 눈물과 중첩이 되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 기억 속 푸른 눈동자와 그날의 내 아이가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내 아이는 중국말을 해보라는 조롱 하나에도 그토록 모욕감을 느끼고 꼬맹이 주제에 중학생한테 발길질을 할 만큼 분노했는데, 그 아이는 동네 아이들이 떼로 에워싼 채 막대기로 찌르고, 밀어내고, 야유를 보냈으니…….


최근 몇 년 사이 외국인들이나 다문화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한국의 연예계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다른 인종에 대해 열려가는 한국인들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 같아 나는 그들의 활동을 반갑게 여기는 입장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나이지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한현민 군이 가족과 함께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는데 한현민 군의 어머니가 한 말 중 마음에 훅 들어오는 게 있었다.


“현민이가 어릴 때는 영원히 이태원을 떠나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걸 설명해주는 한 문장이었다. 생각 없이 던지는 말들, 무심코 쳐다보는 시선들 속에서 얼마나 마음을 많이 다치며 현민 군을 키웠을까 싶어 나도 울컥했다. 또래 청소년들이 쓰는 ‘평범한 급식체’를 구사하며 유쾌하게 방송에 임하는 현민 군의 밝은 성격이 기적 같아 보일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송에 나온 연예인들이 ‘흑형’이라든가 ‘흑언니’라는 표현을 겁도 없이 쓰던 동시대의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말이다.  


<플랫라이너>라는 영화가 있다. 2017년에 리메이크 작이 나왔으나 내가 본 건 줄리아 로버츠와 키퍼 서덜랜드가 함께 나왔던 오리지널 버전이다. 의대생들이 돌아가면서 죽음을 체험하는 소재의 이야기로, 인물들은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죽어있는' 시간을 늘려가게 된다.


그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시간을 늘리는지 밝혀내는 게 결국 영화의 주제가 되는데, 그건 바로 각자의 의식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후회’와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식의 우물 깊은 곳까지 잠수해 들어가 과거에 했던 일과 대면해 화해하는 일. 오리지널 전작도 그렇고, 리메이크 버전도 그렇고 영화는 큰 반향을 얻진 못했다. 획기적인 소재일수록 결말이 교훈적으로 흐르면 맥이 빠지기 마련이라 그랬던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푸른 눈의 그 아이가 생각날 때마다 반사적으로 그 영화를 떠올린다. 내 속에서 재생되는 영화 속의 나도 마음의 깊은 우물을 향해 헤엄쳐 내려간다. 우물의 바닥, 그 골목길에 도달한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푸른 눈동자가 보인다. 나는 무리를 헤치고 들어가 푸른 눈동자에게 손을 내민다. 함께 놀자고.


하지만 수백 번 수천 번 같은 엔딩을 반복해봐야 결국 슬퍼진다. 내 기억은 영화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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