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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Dec 08. 2019

결국은 받아들인 미국의 명절

추수감사절 가족 레시피 완성을 기념하며

미국에서 살기 시작하고 몇 년 간은 이곳의 명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기질 못했다. 계절마다 최소 두 가지는 되는 행사나 명절 때마다 미국식 덕담을 주고 받으며 풍습을 따르고 요란을 떠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남의 나라 문화로만 느껴질뿐 도통 내 것 같지가 않았다. 이를테면 이 나라 명절에 주인 정신 같은 게 없었다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명절 뿐 아니라 미국의 모든 것을 향해 한동안은 그런 태도를 견지했었지 싶다. 유학생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해서 미국에 살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 뿌리를 내리겠다고 결심한 바는 없었고, 남편이 미국에서 직장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그건 그저 일시적인 경험이리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구나 결국 알게 되듯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예측대로 흘러가는 건 별로 없고, 난 생각보다 꽤 오래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다보니 더이상 미국의 풍습들을 삐딱한 태도로 밀어낼 수는 없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추석이나 설 분위기를 알게 해주진 못하더라도, 이곳의 명절만큼은 여느 미국 아이들 못지 않게 즐기면서 자라도록 해주는 건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는 성장기 아이들의 각종 행사 때마다 조부모를 중심으로한 일가친척들이 서로를 챙기며 떠들썩하게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한번도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자라는 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내가 변해야 했다. 떠들썩한 명절은 경험하게 해주지 못하지만 우리 네 식구의 유대감을 기억하게 해줄 순 있으니까.


발렌타인데이에 함께 만드는 초콜릿 디저트, 독립기념일마다 불꽃놀이를 보러가는 공원,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에는 둘러앉아 쿠키를 만든다거나 하는 것들. 해마다 꾸준히 반복하는 가족 이벤트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들의 기억에 켜켜이 쌓여간다. 혈연, 지연, 학연이 전무한 곳에서 살아간다는 건 때로 무릎이 꺾이는 서러움을 경험하게 하지만 그만큼 우리 넷을 끈끈하게 엮어주기도 한다.


오늘은 미국의 대명절인 추수감사절이다. 해마다 요리책이나 온라인을 참고해 기존 메뉴를 베이스로 조금씩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해보는데, 어떤 건 성공하고 어떤 건 그저 그렇다. 기쁘게도 오늘 만든 것들은 실패가 없어서 올해를 기점으로 우리 집 추수감사절 레시피가 완성됐다는 기분이 든다. 우리 가족의 작은 역사 하나를 세웠다는 도취가 안도를 준다. 아이들은 언젠가 둥지를 떠나겠지만 오늘 완성된 맛이 아이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주었으면.


레시피 노트를 정리해두어야겠다. 내년, 후년,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같은 걸 먹으면 아이들에게도 역사로 남지 않겠는가. 별 것 아닌 기쁨으로 특별해진 2019년 추수감사절이 이렇게 지나간다. Happy Thanksg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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