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는 고독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말이다.
출처 -나이듦과 죽음에 대하여-
외로움은 가까운 이들과 시끌벅적한 한 곳에 있어도 일순간 온몸의 열이 식는 기분처럼 찾아온다.
한편 고독은 거기에 충실히 집중하면 오히려 땀이 배어 나오는 열감을 동반한다.
고독은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나 자신과 피할 수 없이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홀로 된 사람이나 혼자를 가리켜 고독이라 단정한다.
사회면 기사에서 종종 눈에 띄는 단어 중 하나는 고독사로, 숨을 거둔 후에도 방치된 불우 하거나 안타까운 처지의 이웃들을 다룬 내용이다.
고독사. 분류에 따라선 아주 정확한 지적이다. 고독이라 함은 부모 없는 어린 아이나 자식 없는 노인을 일컫기도 하는데 이들의 죽음을 고독사로 지칭하는 건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사로 자주 접하는 고독사 사례에는 자식은 물론 일가친척도 여럿인 이들의 사망 소식도 비일비재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 곁에 아무도 없이 쓸쓸히 숨을 거둔 탓에 고독사로 세상에 알려진다.
이처럼 고독은 마치 종국엔 불행을 안겨주는 공포와 비슷한 이미지를 던진다. 홀로 고단하고 지친 삶을 견디다 작별인사도 없이 또 홀로 세상을 등지게 되는 고독의 말로.
과연 이것이 고독의 속성인가?
과연 배타적 삶의 여정에서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운명의 형태인가?
이도 아니면 충분히 선택하고 가부결로 결정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쯤으로 보아도 되는가?
고독을 단순히 갇힌 공간에 홀로 남겨진 형상만을 묘사하면 의미가 축소된다.
고독은 이보다 훨씬 함축적이며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나 자신과의 협상이다.
고독에 잠기면 저절로 내 안의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것이 나를 즐겁게도 슬프게도 혼란스럽게도 만들며 때로는 자책하거나 죄책감에 사로잡혀 힐책하도록 조종한다.
주위의 자극이 사라지면 이런 증세는 더욱 뚜렷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쉴 새 없이 자극을 보충하지 않으면 고독이 내미는 악수를 피할 재간이 없다.
자극의 종류로는 여럿이 있지만 고독에서 벗어나는 수단의 자극으로는 대화를 우선 꼽을 수 있다.
대화는 그 내용에 중점을 둬야 마땅할 것 같지만 막상 내용보다는 상대의 음성에서 전달되는 소리의 파동으로 감각기관을 흥분시키는 작용의 영향이 더 크다.
그와 함께 발화자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따라가는 시각도 자극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말하는 대상을 바라보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고독에 빠지기는 여간해선 어렵다.
어려운 것이지 가능한 이도 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세상으로만 움직이는 강력한 의지를 발휘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범상인인 대다수 우리들은 눈앞에서 말하는 대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좋든 싫든 소리에 담긴 내용의 진위 파악에 매달린다.
이 와중에 어딘가 깊숙이 묻힌 고독의 잔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그렇다 하여 고독을 잡념이나 떠올리는 부질없는 짓으로 절하시켜선 곤란하다.
갈수록 대인관계가 피로해지고 가뜩이나 얇은 지갑만 축내는 손해 보는 경제활동이라며 교류를 회피하는 고독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혼자라면 타인의 의견에 끌려 다니거나 맞장구 칠 필요 없이 오로지 나의 취향과 결정으로 다양한 활동들에 간섭받지 않아 속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주장과는 상반되게 그들의 행동을 잠시만 지켜보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거나 타인에게 고독한 형상으로 비쳐지길 상당히 꺼리는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대표적 표상이 핸드폰이다. 홀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거나 거리를 거닐거나 카페에 앉아 있을 때에, 우두망찰 하는 것보다 핸드폰을 잡고 있으면 대중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키고 쓸쓸한 이미지를 덜어내는 좋은 방편이 된다.
특히나 요즘은 각종 스트리밍 콘텐츠가 제공되어 듣고 보고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말 그대로 정보 홍수다.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려 핸드폰을 여는 건 이젠 너무나도 현실이 되어버린 현재다.
그런데 정말 그 많은 정보들이 반드시 필요해서 손바닥만 한 기기에 그리도 열중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말소리 자극이 필요해서는 아니고?
진심으로 고독에 잠겨 자신의 순전한 결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자유롭고 싶다고 외치면서 왜 핸드폰 속 타인의 소리에는 스스로 결박을 자처하는 것일까?
더구나 그런 일방적 자극은 소통에 한계를 가져오는 데도 말이다.
한계와 제약 안에서 덜 피곤하고 경제적인 대인관계를 구비할 수 있어서라고 답하고 싶다면 당신은 진정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을 공산이 크다.
오히려 편히 기댈 수 있고 무한한 이해심으로 당신을 보듬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대상을 내심 바라는지도 모른다.
언쟁과 균형 잡힌 교감에 지쳐 수신만 가능한 발신 정지 핸드폰 상태로 알맞은 수신 주파수를 찾아 방황하는 중일 것이다.
그것이 굳이 인간 형상이 아니어도 상관없게끔 핸드폰 속에서 말 상대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지치지도 않아 효율적으로 방황하게 유도한다.
혼자서도 자유로우려면 필연적으로 고독과 정면대응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고독은 들어주기가 고역일 만큼 내면의 시끄러운 소음을 능숙하게 차단하거나 조절할 수 있어야만 즐길 수 있는 게임과 비슷하다. 고독을 하나의 놀이로 주무른 인물을 소개하자면 둘이 떠오른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그르누이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리언이다.
소설에서 이 두 인물은 악행과 범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악한으로 설정되지만 이것과 별개로 그들 각자의 고심과 갈등과 대면하는 고독을 상세하고도 장황하게 묘사한다.
소설 전개에서 적지 않게 차지하는 이 분량은 독자에게 정밀한 수고를 요한다.
인물의 고독에 개입하려면 독자 또한 동질의 고독에 관한 경험이 전제되길 희망한다.
그러나 순서는 뒤바뀌어도 무방하다.
인물이 어떻게 고독을 다루는지 먼저 관찰하고 자신에게도 ‘가능한 정도’를 적용해 보는 것이다. 인물들처럼 극한의 고독에까지 몰아 부칠 필요는 없다.
결국 고독은 주체성의 표현이다.
스스로를 주도할 때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초대에 응하는 잠재된 나와의 만남이다.
혹시 이런 만남이 부담스럽고 꺼려져 관심을 돌리려고 위장한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오히려 육성으로 자극받는 만남을 갖는 편이 훨씬 유용할 수 있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대화 속에는 타인의 의사에 대응하며 나를 밝히는 대목이 분명 있다.
설사 그것이 내게만 부당한 일방통행으로 이뤄지는 대화라 하더라도 그렇다.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으나 반감을 갖는 것 또한 나의 의사이다.
그러는 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자신의 어느 한 단면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느낌들을 수집한 후 훗날 고독을 맞이하면 흥미로운 구절로 가득한 책장을 읽는 기분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