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약초콜릿 Apr 18. 2020

9. 이번 생은 망했어요.

 느닷없이 환생을 믿는지 질문받으면 섣불리 긍정하기가 어렵다.

왠지 그렇다 답하면 이성과 논리가 부족한 인상을 남길 것 같기 때문이다.


 환생을 연역이나 귀납의 과학적 방식으로 증명하기는 까다롭지만 그 예시(혹은 주장)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본인이 환생한 인물이라며 나선 경우들이 그 예이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너무나 정확하고 사실과 일치하는 일목요연한 환생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어 설득력과 신뢰를 얻는다.

또한 환생의 개념을 상상이 아닌 미지의 지식으로의 인식 전환을 꾀한다.


즉, 환생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몇몇의 특별 대상만 후생에도 또렷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통에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만약 이번 생이 자신의 유일한 생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 중 상당수는 심각한 무력감과 방탕에 빠져 허송할 게 뻔하다.

어차피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는데 적당히 버티다 성에 차는 인생이 발밑에 떨어졌을 때 신나게 살면 될 일 아니던가.


 이런 아둔한 짐작을 경계하여 세상의 누군가는 타이른다.

이번 생에서 최선을 다하고 덕을 쌓아야 후생에서 덜 괴롭고 똑같은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예방법도 알려준다.


착하게 살라.


 착하다는 말은 사람의 성품과 인성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무생물을 형용할 수 없는 단어로 사람의 성향을 가리킨다. 공손하고 예의 바르며 매사 침착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하며 정의를 실현하고 이타적 면모가 눈에 띄면 착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항목들은 너무 추상적이다. 그러해서 실생활에서 착한 사람의 태도는 온순함으로 압축된다.


곧, 착하게 사는 것은 온순하게 세상이 닦아놓은 길과 방향을 따르면 환생한 다음 생에서 행운과 복을 누릴 수 있음을 내포한다.


 그런데 요즘의 착함은 마치 어눌하고 어디가 모자라서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인 모습으로 통한다.


오죽하면 ‘착한 사람 콤플렉스’까지 있겠는가.

착한 사람으로 살아 이번 생을 완전하게 통과하고 싶은데 세상인심이 타인의 ‘착함’을 자기 잇속 챙기는 먹잇감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은 콤플렉스까지 생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매체들은 더 이상 착하게 살 필요가 없음을 역설하는 것을 넘어 강력히 권고하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주체의식을 기두로 나를 해치려들거나 손해 입히려는 무리들을 어떻게 처단할지 가르치려 혈안이 되고, 각자도생이라며 남의 안위는커녕 의견도 관심거리가 아님을 설파한다.


이러한 기조가 팽배한 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당연히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착함을 배제하는 사회는 어디든 경쟁과 성과가 중시되고 선두를 차지하는 게 목적이다.


우아하게 세력을 과시하느라 본인의 재능과 능력뿐 아니라 출신과 계층의 특권을 은연중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것을 가장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데가 각종 sns 계정에 올라온 사진들이다. (물론 여기엔 진짜와 허세가 공존한다.) 이들은 구태여 착한 인상을 남기려 애쓰지 않아도 타인의 관심과 호의를 너그럽게 얻는다.


 이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러운 대상에게 경탄을 표하게 되고 부러움과 친절을 얻는 사람은 착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저절로 착하게 살게 된 사람은 마땅히 환생하여 다음 생에서 만복을 누릴 수밖에 없다는 귀결의 문제이다.

이들은 영원히 회귀하는 인생에서 언제나 호화롭고 느긋하고 매력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이치 아니겠는가?  


 이렇게 가정하면 너무나 허탈해져서 거칠고 건조한 인생은 결국 ‘이번 생은 망했다’고 단정 짓게 된다.


 ‘이생망’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이생망’으로 여긴다면 이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환생을 믿는다!


 환생의 전제가(이생망에 결정적으로 끼친 요인이 경제 수준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번 생을 스스로 포기하도록 여지를 준 것이다.

막상 환생에 대한 그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으면서 환생 후의 삶을 기다리며 지금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려고 결정했다면 다음 인물들의 인생을 한번 들여다보길 추천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은 제목에서부터 그 주제를 아우른다.

결단과 노력으로 희망과 목표를 채우고 성취하는 생이라기보다는 필연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생에 대해 그린다.

 태생부터 결정된 민족과 인종, 문화, 역사가 한 개인을 넘어 무리와 집단의 인생행로(교육•직업•경제 수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지배하는지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히, 화자인 어린 남자아이 모모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점은 더욱 비극적이다.

모모를 둘러싼 숱한 어렵고 고통스러운 어른들의 삶의 방식이 모모 앞에 놓인 생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모모는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너무 일찍 잃어버리는 상실의 아픔을 겪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모모는 생을 포기하거나 무기력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두껍고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생일지라도 사랑함으로 하여 충분히 가치를 둘 수 있음을 강조한다.


 뜻밖에도 여럿의 관심과 아첨이 아닌 한 사람의 깊은 신뢰와 애정이 생을 태동케 한다.

비록 제자리걸음일지언정 멈춰 서지 않아야 삶의 근육이 소실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한 사람 덕분에 혹은 때문에 당신의 생이 양분을 흡수하고 또한 제공했다면 현재 주어진 생을 이생망으로 결론짓는 섣부름은 삼가도 좋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8. 갈수록 혼자가 편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