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화가 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지만 당시는 분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 있다. 아니면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나중에 따져보니 화를 내고도 남을 법한 일도 있다.
결국, 화를 내는 것도 타이밍을 맞추는 기술이 필요한 셈이다.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하거나 곱씹지 않으려면 화도 적당히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어렵지 않은가? 그렇잖아도 간신간신 살아내는데 화까지 다스려야 하다니 말이다. 둘러보면 너무도 쉽게 감정을 드러내고 속 시원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처럼 내지르고 사는 모습이 편해 보일 때도 있다.
대다수 우리는 화를 참는다. 경험이든 가르침이든 화가 난다고 무작정 화를 내는 것이 이롭지 않음을 배운다. 또한 인격과 인성의 함양에도 하등 도움 될 것이 없다고 여긴다. 게다가 교양인이라 하면 온화한 인품을 결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고고한 태도의 주인이라는 이미지를 체득했기에 그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려고 노력한다. 이것의 쉬운 방법이 바로 화를 참는 것이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고 사회생활에서 유리 할리 없다. 누구나 이런 인상을 가진 이를 멀리하는데 어느 누가 교양인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 노력에서 발생한다. 조직과 대인관계 내에서 조금이라도 이점을 차지하기 위해 교양인의 가면을 쓰느라 고단한 정신은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를 못한다. 치열하게 노력한 사회에서 가정으로 돌아가면 긴장을 완화하고 피로를 풀어야 하는데 어지간해선 어렵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밀린 업무나 과제 처리, 가족 불화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온전한 휴식의 부재다. 온전한 휴식은 잠깐이라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하루 종일 내가 아닌 누군가와 입씨름과 감정교류로 소모된 심신의 에너지를 보충하려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실상은 힘겹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해도 빡빡한 도로에서 시달리고 대다수 현대인의 거주형태인 공동주택(아파트, 빌라, 오피스텔 등)은 구조상 원치 않아도 타인의 흔적을 느끼고 감당해야 한다. 그중 층간소음은 사회문제로 꾸준히 지적될 만큼 심각성이 크다.
휴식을 취하고 이미 날 선 김정을 평평하게 고르고 다질 공간인 집에서조차 타인의 개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집은 분명 아늑함과 평온을 느낄 유일한 장소이지만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고 대다수 현대인의 밤까지 낮과 같은 교양인의 가면을 요구한다.
층간소음을 유발하지 않으려고 '내 집'이라는 곳에서도 발걸음을 마음껏 떼지 못하고 타인에게는 소음이 될 활동을 자제하길 요청받는다. '내 집'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힌 이상 배려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속박되는 것에 불편과 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내 집'과 '공동주택'의 이중적 개념이 상충하는 데서 불거진다. 집과 주택은 교집합으로 묶였으면서 다른 개념이다.
집이 가정이라는 측면과 조금 더 맞닿아 있는 반면, 주택은 외관상 건축물의 형태를 지칭한다. 쉽게 말해, 외간상 '공동주택'인데 '내 주택'과 일치시킨다. 엄밀히 '내 주택'이려면 타인과 공유한 벽과 천장 바닥이 없어야 하는 것이 이치일 것이다. 공동주택 개념이 바로잡히지 않는 이상 이 같은 불협화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실이 이처럼 구속과 불편을 자아내는데 분노를 삭이기는 어렵다.
교양인의 가면을 쓰려면 적어도 사회에서 겪는 경쟁과 소모된 자아를 충전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어야 하는데 집이라는 곳마저도 나보다 타인을 배려하길 바라는 지경이다.
혹은 다른 이유로 집이 휴식을 망치는 요인이 된다. 집값이 과도하면 충분히 괴로운 심경으로 살게 된다. 대출금이든 임차료는 주택에 지출하는 비용은 분명 기회비용을 발생시킨다. 집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생활수준과는 현저히 차이 날 수밖에 없다.
감독 안국진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감독 전고운 영화 소공녀는 모두 집과 주택의 개념과 가치를 다룬다. 한 영화는 주택 구매를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다른 한 영화는 아예 집을 포기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내용상 이 두 편의 영화를 비교 하기보다는 내재된 메시지를 읽는 측면에서 두 편 모두를 감상해도 좋다.
두 영화는 집과 주택의 불분명한 차이점을 제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목적과 행복의 추구가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말린다. 즉, 가화만사성의 출발인 집의 평화와 주택공급 안정은 국가정책과 사회 논리와 연결되었음을 시사한다.
가화만사성. 이제 가정이 평온하기 위한 노력은 가족화합만으로는 부족하다. 주택의 소유 여부와 그 질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나아가 주택이 사회집단에서 역량을 발휘할 터전이 되어주기까지 한다면 억측이라고 꼬집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