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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송 Aug 22. 2019

살아있는 주제에, 죽음을 논한다니요

영화 <풀잎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뚜벅뚜벅.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리고 그 길은 생과 사의 가운데, 회색지대다. 우리는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살아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주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를 좋아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원히 알지도 못할 거면서. <풀잎들>은 흑백영화이고 ‘죽음’에 대한 영화다. 영화가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 (어쩌면 명백한 흑색과 백색보다 더 많을 듯한)회색들로만 이뤄진 흑백영화인 것이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영화 전체에 짙게 깔린 듯하다. 영화 곳곳에는 죽음이 풀잎처럼 심어져 있다. 친구 혹은 연인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자살기도를 했다가 살아서 후배를 만나러 온 남자도 등장한다. 보다 면밀히 이야기하자면 <풀잎들>은 ‘죽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인물들의 리액션에 관한 영화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것은 죽음뿐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여전히 만국공통, 만인평등,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풀잎들>도 그 알 수 없는 ‘죽음’이란 걸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들여다본다. 고무대야 속 풀잎들을 바라보는 <풀잎들> 속 등장인물들처럼 말이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서로 다른 크기의 고무대야들은 옹기종기 한 카페 앞에 모여 있다. 대야 속에 옹기종기 피어난 풀잎들의 모습은 카페 안에서, 밥집에서, 길가에서, 여기저기서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는 <풀잎들> 속 인물들과 겹쳐진다. <풀잎들>에서 여러 그룹으로 묶여 이야기하는 이들은 풀잎들로, 각 그룹은 고무대야로 치환하는 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중 아름(김민희)은 유일하게 고무대야 밖에서 그 속에 사는 풀잎들,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찰자다. 최종적으로는 관객들은 그런 아름을 관찰하는, 그런 구조이다.         


고무대야 속 사람들 이야기

첫 번째 고무대야에는 미나(공민정)와 홍수(안재홍)라는 풀잎들이 있다. 그들은 친구 승희의 죽음에 대한 리액션을 보여준다. 미나는 본인의 마른 몸집보다 큰 백팩을 짊어지고 카페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백팩은 미나를 깔아뭉갤 만큼 크지는 않다. 유럽여행 가려고 싼 백팩이라고 하지만 후에 사실 불안해서 그냥 가지고 다니는 거라고 밝혀진다. 아마 자살일 승희의 죽음은 미나에게 너무 큰일이고 미나는 그래서 사는 게 버겁다. 미나의 백팩은 미나의 삶의 크기이자 삶의 무게이다. 어디에 막 두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런데 나보다 커서 버거운. 살아야겠는데 너무 무거운. 카페 테이블 앞에 앉은 홍수(안재홍)에겐 미나와 같은 가방이 보이지 않지만 홍수도 자신만의 백팩을 가지고 있을 터. 그들은 삶의 무게에 못 이겨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악다구니를 쓴다. 카메라는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그들을 좌우로 패닝하며 지켜본다. 그러나 결국 “사랑해” “사랑해, 나도”하며 둘은 백팩을 이겨낸다. 미나와 홍수의 백팩은 딱 그만한 크기다. 죽지 않고 힘겨워도 짊어질 수는 있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크다.     

그들의 테이블 근처에는 그들처럼 삶의 무게를 진 또 다른 풀잎들이 앉아 있으니. 그들은 두 번째 고무대야 풀잎들이다. 창수(기주봉)는 성화(서영화)에게 담담하게 자신의 자살을 이야기한다. 사랑을 어찌하지 못한 창수는 죽음을 택했었다. 사랑의 대척점에 죽음이 있는 것. 그러나 결국 죽으려했으나 죽지 못한 창수는 이제 죽는 방법이 아닌, 살아가는 법을 생각해야만 한다. 전세금도 다 쓰고 극단도 나온 창수는 성화에게 “어디에 사”는지 묻는다. 그리고 성화의 “살만”한 주택에 남는 방을 빌려달라고, 자신이 살기 위해 살 곳을 빌어본다. 성화의 남는 방은 비어있지 않다. 성화는 창수에게 방을 내어줄 마음은 나지 않는다. 거절당한 창수는 민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성화를 말없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살 곳은 얻지 못한 창수는 죽은 사람처럼, 마치 박제된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뚫어져라 성화를 바라본다. 사랑을 잃고 죽으려 했으나 그 죽음도 잃고 다시 삶으로 돌아온 창수는 생기가 없다. 창수에겐 누군가의 사랑이 절실해 보인다.     


카페 안에 이렇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걸 모르는 걸까. 카페 밖, 테라스의 풀잎들은 경쾌하다. 세 번째 고무대야의 풀잎들, 경수(정진영)는 들뜬 목소리로 지영(김새벽)에게 “사랑이 최고야. 나머지는 다 그게 안 돼서 하는 거야”하고 말한다. 사랑이 없어 죽으려던 창수와 사랑이 최고라는 경수. 나는 그 둘을 보며 문득 공식이 떠올랐다. ‘(삶 = 사랑) ↔ 죽음’이라는 <풀잎들> 세계가 가진 공식.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이런 경직된 ‘공식’이란 단어가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이런 공식이 계속 떠올랐다. 이는 감독이 경수와 창수의 입을 빌어 사랑을 최상위포식자의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누군가의 목숨도 빼앗을 만큼 강력하다. 그간 수많은 영화를 통해서 감독은 말했다. 사랑은 삶의 전부이라고. <풀잎들>의 공식에 따르면 삶은 사랑이고 사랑한다의 반댓말은 과거형, 사랑했다가 아니다. 죽음이다. 흑백영화 <그 후>에서 나온 “왜 사세요?”라는 질문은 왠지 흑백영화로서는 바로 그 다음 순서인 이 <풀잎들>에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듯하다. ‘왜 사세요?’ ‘사랑이 최고야. 사랑을 위해 살지요.’ 카페 밖 테라스에 있던 경수는 후에 카페 안 창수와 성화 테이블과 섞이게 된다. 갈 곳 없는 창수에게 경수는 자신의 집 서재를 내어주겠다 말한다.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다.

          

카페 안의 풀잎들의 죽음 이야기는 솔깃하다. 그러나 <풀잎들>의 백미는 카페 밖에 있다. 어느 밥집에서, 아름이 아닌, 카페 안 인물들이 아닌 인물들의 죽음 이야기. 죽음에 대한 리액션이 이 영화의 백미가 된다. 밥집에서 순영(이유영)과 재명(김명수)은 최교수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이제껏 보던 것과는 다르게 오버숄더숏으로, 재명의 어깨 너머로 순영을 보여준다. 죽은 최교수의 영혼이 재명 뒤에서 순영과 재명을 엿보는 것일까. 죽은 자에겐 말이 없기에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생경한 카메라 각도를 보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카메라가 잠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재명의 옆모습 그림자이다. 순영의 그림자는 프레임 밖에 위치하면서 보이지 않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재명의 그림자만 인식하게 되는데, 홀로 덩그러니 있는 그 그림자는 재명의 것이 아닌 혼자 죽은 유령의 그림자 같다. 재명의 면박에 못이긴 순영은 “사랑한 것뿐이에요”하며 처량하게 흐느낀다. 그런데 순영이 우는 사이 ‘오, 수산나’ 합주소리가 거칠게 끼어든다. ‘오 수산나’의 가사처럼(영화에서는 가사를 들려주진 않지만) ‘오, 순영씨. 울지 마요. 나 때문에 울지 마요.’라고 위로하는 듯,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듯 발랄하기 그지없다. 죽은 최교수의 위로일까. 사랑을 확인한 죽은 이의 마지막 위로.          


재명의 그림자만큼이나 기묘했던 것이 또 있다. 고무대야 속 풀잎들은 겨우 하루의 낮에서 밤으로 간 듯 한데 이상하게 쑥쑥 자라있던 것이다. 분명 티가 날 만큼 무성해졌다.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며 찍는 감독 특유의 작업방식 때문에 영화의 크랭크인 때보다 크랭크업을 앞둔 풀잎들이 키가 더 큰 거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카페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휴게소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곳은 묘한 장소이고 그래서 그곳의 시간도 묘해서 현실의 시간보다는 조금 더 빨리 간다는 그런 생각. 그리고 풀잎은 카페의 이상한 시간을 따라서 쑥쑥 빨리도 자란 것이다. 영화 끝까지 아름의 동생과 그의 여자친구는 카페 바로 옆에서 놀지언정 카페에 한번을 들어오지 않는다. 그전에도 아름을 부르러 동생은 카페 앞까지 왔으나 그 바깥에서 유리너머 아름을 불렀다. 그곳은 사랑으로 충만한, 그래서 완전하게 삶 쪽에 가 있는 것이 분명한 이 둘이 들어오는 곳은 아닌 듯하다. 진호(신석호)와 영주(안선영).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고 그들의 이름을 공기 중을 타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진다. 분명한 이름이 있고 분명한 사랑이 있고 그래서 분명한 삶의 의미가 있는 이들. 그들은 카페 속 이름이 없는, 영화 밖인 엔딩크레딧에서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나머지 이들과는 다르다.    



고무대야 밖에서 고무대야 안으로,

영화 밖에서 영화 안으로

그럼 관찰자인 아름도 카페 안 그들과는 다른 인물일까. 그러나 아름은 영화에서 관찰자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아름 또한 관찰당하는 입장에도 있었다. 경수는 아름을 계속 인식하고 있었으며 아예 아름의 테이블로 비집고 들어와 무얼 쓰냐고 묻는다. 아름의 행위를 보고 그 표면만 읽은 것이 아니다. 그 속까지 읽어냈는지, 경수는 아름을 “비범한” 사람이라 칭한다. 가족인 진호 또한 아름을 “힘든 면이 있는 사람”이라며 평한다. 아마 가족으로서 함께 부대끼며 아름을 지켜본 경험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다른 이들에 비해 아름에게 관심 보일 틈이 없어보였던 홍수 또한 아름에게 “어떻게 이렇게 밤까지 쓰”냐며 실은 아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아름은 관찰자인 동시에 피관찰자이기도 한 셈이다. 밴다이어그램 밖에서 안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던 아름은 실은 나머지 이들과 함께 그 안에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의 층위는 같다. 아름도 그들도 똑같은 사람, 똑같은 풀잎이다. 결국 테이블을 넘어오지 않을 것 같던 아름은 엔딩에 이르러서야 돌연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카페 유리창을 넘어 그 모습만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이때 드는 생각. <풀잎들>을 구경하는 우리도 사실 관찰당하는 사람이란 것.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고 영화 입장에서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감독이 세상을 살며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그들로부터 느낀 감응을 표현한 것이 영화일 터. 그리고 우리, 사람들은 감독이 관찰한 세상을 관찰한다. 서로가 관찰하고 또 관찰당하는 풀잎들이다. 영화와 나와의 층위 또한 같다. 영화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이야기다.

          

아차, 영화에서 중요한 또 다른 이를 빼먹을 뻔했다. 바로 ‘클래식’이다. 빼놓고 지나가면 섭섭해 할 정도로 카페 속에서 큰 소리로 흐르던 클래식 음악. 음악은 눈치도 없이 대화에 끼어들고 계속 흘러나오면서 관객들이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걸 방해한다. 클래식 소리는 퍽 큰 편이라 우리는 열심히 집중해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또 집중하면 그들의 대화가 잘 들리기는 하는, 그런 애매한 크기의 음악소리다. 대화를 곱씹고 음미하는데 실패하진 않을, 딱 그만큼만 큰 음량이다. 결국 클래식은 미나의 백팩과 같은 존재라 여겨진다. 백팩이 삶의 크기였다면, 삶의 무게였다면 클래식은 삶의 방향으로 느껴진다. 우리들이 악다구니를 쓰고 울던 방을 부탁을 하던, 울던지 웃던지 신경도 안 쓰고 미래로, 일방향으로 마구 흐르는 것이 영락없이 클래식은 우리 삶이다.               


<풀잎들>은 ‘죽음’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삶’에 대한 영화다. 또한 ‘사랑’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죽음은 죽은 자에게는 다 끝난 일, 하등 관계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주제에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할 것이다. 살아있는 때에나 죽음을 논할 수 있으니까.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죽음을 논할 자격이 있다. 감독은 그런 연유로, 다음 영화 <강변호텔>에서 또 죽음을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 이야기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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