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사이에 ‘거리두기’
내 남편은 공황 장애 환자다. 우리는 30대 초반에 캐나다에 정착한 후 하루 벌어 하루 살던 시기를 거쳐 5년 전부터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남편은 본인 인생에서 가장 안정된 시기가 찾아온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황 장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민 초창기 남편의 증상이 처음 시작됐을 때 우리는 단순히 폐소 공포증이라고 생각했었다. 증세가 심하지 않았고 빈도수도 낮았다. 그러나 공황 장애라는 자각이 생긴 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남편은 자주 호흡 곤란과 더불어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 고통의 강도가 너무 세서 ‘평생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할 정도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캐나다 이민은 나의 선택이었다. 이민 후 시작된 남편의 공황장애가 마치 내 탓인 것 같았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무슨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그저 그 상황을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노력과는 별개로 남편은 자신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하루도 웃는 날이 없었다. 그가 휘두르는 날 선 감정의 칼이 드디어 나를 겨누기 시작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큰 아이는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엄마 말 잘 듣던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달라졌다. 외모는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캐나다인인 딸아이와 나 사이에는 문화적 차이, 세대 간의 갈등, 언어 문제까지 발생했다.
내가 이민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아이였다. 아토피가 있었던 아이를 깨끗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었고, 입시 경쟁에서 벗어난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이민 온 아이. 그 책임감 때문에 아이의 변화에 이성적으로 대처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간 아이가 내뱉는 짜증을 받아주며 나는 나 자신이 쓰레기 통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감정의 쓰레기를 받아내는 쓰레기통. 남편의 공황장애와 아이의 사춘기 사이에서 나는 매일매일 우울했고, 화가 나고, 억울했지만 그저 내 감정을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그려놓은 ‘행복한 가족’의 그림 속에서 엄마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이었다. 이민 후 나는 ‘가족’에 유난히 큰 의미를 부여했다. 내 안에 존재하던 한국인 특유의 ‘혈연 중심 가족주의’가 나를 보호해 줄 사회적 보호망이 부재한 타국에서 더욱 강화된 것이다. 이민자로서, 소수자로서 타국에서 살아가며 ‘믿을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라는 생각은 나의 책임감을 더욱 무겁고 두텁게 만들었다.
하지만 과하면 탈이 나는 법. 어느 순간부터 가족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하늘만 쳐다봐도 눈물이 났다. 운전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자존감 상실, 우울증, 자기 비하,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가족들과 ‘거리두기’를 했다.
공감하지 않고,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것이 내가 택한 ‘마지막 노력’이었다. 작가 리베카 솔닛의 저서 <멀고도 가까운>을 읽다가 그런 내 선택이 ‘정신적 마비(phychic numbing)’라는 것을 알게 됐다. 비인간화, 무관심, 분리. 사실 이 방법은 올바른 치료법은 아니다. 하지만 리베카 솔닛도 언급했듯이 ‘때로는 필요한 혹은 정상적인’ 자기 보호의 한 수단이다.
나는 이것을 ‘감정적 거리두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관심을 끊고 상대가 원할 때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보호하기로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마 나는 가족에서 ‘잔소리 많은 참견쟁이’였던 것 같다. 남편과 딸아이는 내 도움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섰다. 혼란은 사라지고 평화가 도래했다. 그 와중에 나는 얼마나 나를 지켜냈을까?
나는, 아직은 주저앉아 있는 ‘내 자아’를 일으켜 세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