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의 시작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의 나이를 갓 넘겨 떠나온 호주 이민, 수많은 흔들림속에 만 8년 하고도 반년이 지나 이제 내 나이는 지천명(知天命)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이민을 온 딸아이가 묘령(妙齡)의 아가씨가 되고, 나는 이제 천명(天命)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에게 나이란 그저 숫자일뿐인지, 여전히 세상은 모를 일 투성이다.
얽히고 설킨 세상사는 차치하고라도, 직장 생활, 와이프와의 관계, 아이들 키우는 것 모두 아직도 수많은 시행 착오와 배움의 연속이다.
나만 그런 것일까? 어찌보면 상관없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새해가 되어 50 이라는 숫자가 가볍지 않게 다가오면서 갑자기 12년전 '무릎팍 도사'라는 프로그램에 한비야씨 - 나와는 정확히 12년 띠동갑이다 - 가 나와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 나중에 커서 제가 어떤 사람이 될지 정말 궁금해요 !" 한비야씨가 지금의 나와 같은 지천명의 나이에 한 말이였다. (그 당시 한 집안의 가장으로 두 아이를 키우며 38살의 나이로 외국계 IT 회사에서 차장 타이틀을 달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나는 불혹의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마치 나의 인생길이 이미 마지막까지 다 정해져 있다는 듯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비야씨의 말에 둔기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 나중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해지는 삶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우선 브런치에 나의 이민 일기를 올려 작가라는 꿈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내가 쓴 글이 이민을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함도 함께...
아래 글은 이민을 실행하기 망설이던 시점에 나의 생각을 정리했던 글이다.
* 나는 왜 이민을 선택하는가?
1. 영주권 취득
- 새로 옮긴 회사에서 교육으로 2달간 시드니에 갔을 때, 시드니에 거주하는 친한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2008년 영주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 와이프에게 영주권 얘기를 하니, ‘거기를 왜 가야 되는데? 지금도 여기서 충분히 행복한데’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와이프는 늘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반대하지는 않는 입장이라, ‘갈 생각은 없지만, 당신이 영주권을 따고 싶어하니까 한번 해보세요. 가고 안가고는 나중에 내 마음이니까…’
- 에이전트와 계약서 쓰고, 기술심사 서류 준비하고, 처음 본 IELTS 시험에서 급 좌절… 법무사 얘기로는 토익 800 넘으시면 금방 6.0 받을 수 있을거라고 했는데… 핑계지만, 회사일에 쫓기고, 나름 학원 안 다니고 혼자 하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2010년 7월 SA 주정부 후원으로 176 Visa 취득.
- 초기 입국 전 부모님께 영주권 취득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데 마치 큰 불효를 하는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너무도 흔쾌히 ‘영주권 받기 어렵다던데, 어떻게 받았니? 애썼다.’ 하시며 언제 갈지, 시민권은 어떻게 취득하는지를 물어보셨다. 비록 식사 한끼 같이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매주 부모님댁에 간다. 손주들 얼굴 열심히 보여드리는게 효도라고 믿고... 자식, 손주를 오랫 동안 못봐도 상관없으신걸까? 아니다. 자식과 손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다스리시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2. 초기 입국
- 전적으로 호주 이민 결정은 와이프에게 맡기기로 했다. 호주 관련 카페들에서 한 목소리로 하는 얘기가 부부가 모두 동의해서 이민을 해도 힘들기에, 반드시 부부간에 동의가 중요하다고 하여, 호주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비행기는 비록 경유를 하는 싼 티켓을 구매했지만, 먹고 자는 것은 부족하지 않도록 준비를 했다. 호주에 대해 와이프가 좋은 이미지를 갖고 돌아가서, 나중에 본인이 이민 가자고 해서 갈 경우 후에 어려움이 닥쳐도 나를 원망하지는 않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도 어느 정도 있었다.
- 대부분 삶의 현실에서 벋어나는 여행이 그렇겠지만, 특히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11월초의 호주는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비록 시드니에서는 비가 자주 왔지만, 우리가 초기에 정착해야 할 에들레이드는 연일 너무도 맑고 따스한 날씨가 포근함 그 자체로 다가왔다.
3. 일상으로의 복귀
- 초기 입국을 다녀온지 넉달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다시 일상에 젖어들면서 이민을 가기가 살짝 두려워진다. 영주권 취득부터 초기 입국까지 한바탕 꿈을 꾼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영주권을 준비할 때는 영주권만 따면 무엇인가 큰 일을 해냈고, 밝은 미래가 펼쳐지고 한국의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을 벋어나 선진국에서 잘 살아가게 될 줄 알았는데,영주권을 따고 나니 현실이 발목을 콱 잡는다. 영주권 취득이 나날이 어려워지는 요즘 아이들을 생각하면 영주권을 포기할 수도 없고, 한달에 한번씩 놓아지는 마약(월급)을 생각하면 기러기 가족 밖에는 답이 안 나온다.
-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절대 우습게 볼 수도 없다는 것. 40대가 된 후에는 점점 소심해지는 것은 나만의 성격 탓일까?
4. 와이프의 반전
- 영주권 취득 후 와이프가 슬슬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전업주부로 13년, 바깥 소식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그저 부모님께 효도하고, 저축하고, 아이들 키우는 일에만 관심있던 사람이 슬슬 가정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영주권 취득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듣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호주에서 키우는 것이 좋다는 얘기도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나중에 아이들한테 ‘엄마 그때 왜 호주로 안 갔어요?’ 라고 원망을 듣지는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한다.
- 초기 입국을 다녀오더니, 서서히 정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기 시작한다. 호주 이민에 대한 나의 의지는 와이프의 이민 고려에 있어 점점 퍼센티지가 줄어든다.
- 올해 들어와서 와이프가 생각을 완전히 바꾼다. 자신도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 겠다고. 아이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이민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우물안 개구리에서 벋어나 호주에서 살다보면 영어도 늘 것이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자신을 느끼며 스스로가 좀더 자신감이 넘치는 자신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한다.
- 이제는 나의 입장은 완전 무시한다. 4월말이나 5월초에 입국을 하도록 준비를 하라고 압박을 한다. 기러기 가족은 안된다고 못 박고...
5. 나의 갈등
- 얘기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도의상 지금 직장의 메니저보다 먼저 그만두는 것은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입장이다. 이민을 잠시 미루거나, 허락이 된다면 두세달 무급 휴가를 내고 호주에 가서 가족들만 세팅해주고 다시 돌아와 어느 정도 더 다니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데, 여러가지로 쉽지는 않다. 지금 메니저도 열심히 일은 하시지만,이 자리에 오래 계실 생각은 아니라서...
- 직장은 차치하고라도 집, 애들 학교부터 시작해서, 의료보험, 자동차, 운전면허, 이삿짐 등 소소한 것들까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 '엔지니어로 한국에서 언제까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 후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너무 높아서 대책이 없어.' 라면서 영주권을 준비했던 마음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그냥 버틸 때까지 한국에서 버텨보고 짤리면 그때가서 생각할 껄, 괜히 영주권을 받아서 이민 가면 대책없이 돈 까먹고 늙어 고생하는 거 아니야?' 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6. 이민을 망설이는 이유
- 기러기 가족이 되면 경제적인 안정은 당분간 보장 되겠지만, 외로움은 어찌 할 것이며 가족과의 잃어버린 시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 물론 노력은 하고 있고, 더 노력해야 겠지만, 형편없는 영어 실력 때문에 받을 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면서 겪어야 할 불이익은 얼마나 많을까?
- 한살이라도 젊을 때 더욱 더 저축을 해야 하는데, 저축은 커녕 몇천만원씩 까먹을 앞으로의 1, 2년을 생각하면 노후 생활에 대한 답이 안 나온다.
- 결론은 안정적인 생활을 모두 버리고, 모든 것이 답답한 불확실성의 세계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7. 희망
- 얼마전 지인이 영주권 취득 소식을 접하고 본인도 준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초부터 알려달라고 했다. 최근 MBC 에서 방영하는 ‘위대한 탄생’ 예선에 고등학생이 나왔었는데, ‘살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라는 질문에 ‘자꾸 나이는 들어가는데 이뤄 놓은 것이 없어 힘들다’ 라고 했다고 한다. ^^ 나는 나이 40이 넘도록 이뤄 놓은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때로는 한숨이 나오곤 했는데... 지인의 부탁에 따라 영주권 취득을 하는 과정을 정리해 주다 보니, 나름 열심히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호주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진 것을 실사 없이 증명할만큼 오랜 시간 꾸준히 IT 분야에서 직장 생활을 하여 기술심사를 통과했고, 몇번이나 토요일 하루를 온종일 긴장속에 열심히 IELTS 시험을 봐서 (대학입학시험 때보다도 더 긴장하고 열심히 본 듯하다.) 필요한 점수를 받아 영주권을 취득했으니... 그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하라고 하면 과연 그만큼 끈기있게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다.
- 적성에 딱히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5년을 한눈 팔지 않고, 한 분야에서 열심히 일을 해왔다. 금전적인 손실이 적지는 않겠지만, 내 자신에게 길게는 1년 정도 재충전하면서 쉬어가는 시간을 주는 것도 인생을 길게 보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어도 열심히 하고, 호주의 시스템을 익히는데도 열심히 노력을 할 것이며, 지난 경력을 살릴 수 있는 Job을 찾아보는데도 열심일 것이다. 물론, 자영업을 준비하게 된다면 그전에 해당 분야에서 종업원으로 충분히 일을 경험도 해 볼 것이다. 쉬어간다는 의미가 저축한 돈의 소비없이 온전히 수입으로 생활을 커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겠다는 의미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 지금 당장은 남들과 비교해서 뒤쳐진다는 불안감에 과감히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고, 정해진듯한 길에서 살짝 벋어나 진정으로 내 안으로부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아마도 천천히 가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인생 전체를 100km 라고 봤을 때, 99km만 가면 어떤가! 이제 이쯤에서는 달리는 차에서 내려 잠시 1km 정도는 걸어가며 차분하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계획하는 것도 매우 가치있는 일이지 않을까?
8. 나의 꿈
- 초기 입국 후 일단 초등학생인 아이들은 호주에 가고 싶어한다.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아이들이 너무 크기 전에 온 가족이 세계 배낭 여행을 하는 꿈을 꾼다. 몇번의 해외여행을 하다보니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충분한 설명이 얼마나 여행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지 느끼게 되었다. 시드니 데이투어 때도 느꼈지만, 그냥 눈으로만 보고 사진만 찍는 여행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 큰 아이가 고등학교 가기 전에 온 가족이 세계 사람들과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 소통을 하며 1년 동안 세계 배낭 여행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평생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다.
- 한국의 시스템은 서로 협력하여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키기 보다는 경쟁을 가르치는 시스템이다. 이제 배고픔을 벋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이민을 떠나던 시대는 지났다고 판단한다. 배고픔이 없는 곳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떠나는 이민이 아니라, 돈보다 지위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가 있음을 우리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길 바란다.
9. 떠나기로 마음 먹으며 …
-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올해가 가기전에는 호주에 영주 입국을 할 것이다. 지금껏 나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은 아닐지언정 성실하게 살아왔듯 이제는 내가 선택한 길이 후회로 돌아오지 않도록 열심히 살겠지만, 호주 정착을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주에 정착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가끔은 이민을 온 이유를 망각하고, 극심한 후회와 스트레스에 스스로가 무너지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 될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할 것이다. 내 스스로에게 지금처럼 열심히 살면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라고 최면을 걸어본다.
10. 결론
- 아무리 내 자신에게 물어보아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봐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 정답을 구할 수는 없다. 왜냐면 애초에 선택을 하는 시점에 최선의 선택이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 될지 안될지는 앞으로의 시간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호주 영주권이 곧 행복으로 향하는 열차의 티켓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