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 일기 3 & 4
- 이민일기 3
스피킹과 리스닝이 많이 부족했던 나에게 Diploma 과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한반에 20여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객관적으로 내 실력은 뒤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것 같다. 때문에 과제물을 하느라 가끔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있을때면, 만감이 교차했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한대 피우며 쳐다본 새벽 하늘의 별은 어찌나 그리 밝던지…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때면, 자고 일어나면 한국에서 직장 생활 할 때로 돌아가 있기를 바라는 헛된 상상을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Diploma 과정이 끝날 때가 다가오면서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더 이상 2년을 남호주에서 살겠다는 주정부 후원 당시의 약속에 얽매여 있지는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 약속이 강제성은 없는 약속이라고는 하지만, 끝까지 지키려 했었는데,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가족은 2년을 채우더라도 나는 일자리를 찾아 움직여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남호주를 벋어나 멜번이나 시드니쪽 포지션에도 이력서를 뿌리기 시작하면서 헤드헌터에게 연락오는 횟수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한두차례 Employer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영어 실력과 호주에서의 경력이 없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몇달전 한인 잡지에서 보고 이력서를 보냈던 핸드폰 수리점에서 연락이 왔다. 사업 비자로 호주에 온 분이었는데, 핸드폰 관련 가게를 하면서 영주권을 받은 분이었다. 핸드폰 수리를 가르쳐 주면서 시급 12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디플로마 과정이 2주 정도 남아있던 시점이었는데, 바로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하길 바란다고 했다.
가장의 입장에서 의도치 않았던 1년여의 백수 생활이 워낙 큰 스트레스 였기에, 무슨 일이든 수입을 만들어 보고자 했었는데, 의외로 집사람의 반대가 격렬했다. 좀더 시간을 갖고 IT Job을 찾아보자며, 우선 디플로마 과정을 끝내고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한 후,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또 다시 TAFE 의 Business Management 과정에 등록을 하였다.
그 사이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온 주위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일을 하며 돈을 벌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업비자로 오신 분들은 사업체를 인수하거나 새로이 오픈을 하였고, 영주권을 받고 온 친구는 부부가 새벽에 청소를 나가는 등 어쨌든 호주에서 수입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한푼 벌지 않고, 돈을 까먹는 집은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장사라고는 생전 경험이 없었지만, 카페나 한식당이라도 인수해서 사업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비즈니스 매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산에 맞는 가게는 4식구가 먹고 살기에는 수입이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고, 제법 장사가 되는 듯 보이는 가게는 터무니없이 예산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멜번에서 제법 큰 돈을 벌어 애들레이드에 크게 한식집을 오픈했던 분이 속된 말로 1년도 안되서 쫄딱 망해 집기도 처분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야반도주 하셨다는 소문은 장사 경험 한번 없는 나를 잔뜩 움츠리게 만들었다.
- 이민일기 4
비록 TAFE 과정이기는 했지만, 비즈니스 메니지먼트 과정은 로컬이 대상이라 수업을 따라가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강의 내용이나 조별 토론 시간 모두 4분의 1가량 알아들었던 것 같다. 나머지는 열심히 교재를 참고하며 따라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과연 내가 호주에서 돈 버는 날이 오기나 할런지 막막함이 더 해 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비즈니스 메니지먼트 과정 첫 텀이 끝나갈 즈음 멜번에 있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알고 지내는 한국분이 이번에 조그만 IT 회사에서 Coles 전산실로 옮기면서, 기존 회사에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마침 그 분이 하던 일이 Linux Server 에 Oracle Database 를 관리하는 일이라 나의 경력과 매치가 되는 부분이었다.
이력서를 보내고 나서 바로 다음날 부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30여분 정도의 전화 인터뷰 후 비행기표를 보내줄테니 내일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소개를 시켜주신 분과 연락을 하며 기술적으로는 무엇을 물어볼지 미리 입을 맞춘 후 한국에서부터 고객과 엔지니어로 알고 지냈던 사이로 포장을 하기로 했다.
애들레이드에서 1년을 넘게 지내다 멜번의 웨스트게이트 브릿지를 건너며 보게 된 멜번의 시티는 대도시의 위용이 느껴졌다.
한살 차이로 지금은 형, 동생으로 말을 놓고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된 그 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무사히 인터뷰를 마치고 드디어 취직을 하게 되었다.
처음 3개월은 수습기간인 관계로 본인들이 그만두라고 할 경우 다시 애들레이드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서비스 아파트먼트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수습기간의 급여 Base는 적었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또, 가족이 애들레이드에서 멜번으로 이사올 때 이사비용을 3,000불까지 지원해준다는 약속도 있었다. 다만, 1년안에 스스로 그만둘 경우에는 서비스 아파트먼트 비용과 이사비용을 토해낸다는 조건하에…
드디어 이민온지 1년 2개월만에 호주에서 수입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주에 한번씩 비행기를 타고 애들레이드에 가족을 보러 왔다갔다 하며 두집 살림을 하다보니, 내 수입으로는 나 혼자 먹고 살면서 애들레이드 집 렌트비를 내고 나면, 가족의 나머지 생활비는 여전히 한국에서 벌어 놓은 돈을 까먹는 상황이었다.
서비스 아파트먼트에 있으면서, 회사에서의 점심, 숙소에서의 저녁 모두 주로 3분 요리로 해결을 하였다. 회사가 포트멜번에 위치한 관계로 마땅히 나가 먹을 곳도 없었지만, 한끼에 대략 10불에서 15불이나 되는 식비를 감당할 여력도 없었다.
2주에 한번 금요일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애들레이드에 갔다가 일요일 저녁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멜번으로 돌아오던 생활은 수습 기간이 끝나면서 메니저의 배려로 월요일 아침 첫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것으로 그나마 가족과의 시간에 조금 더 여유가 생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