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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ye Oct 08. 2020

더 쉬운 채식을 위한 소스를 만듭니다.

비건 페스티벌, 제로웨이스트 마켓 셀러, 워크숍 진행과 사업자등록까지

첫 팝업 식당을 마치고는 한동안 채식 결심이 흐지부지 됐다.


장사는 이틀밖에 안 했는데도 왜 요식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에선 요리를 안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팝업 준비 기간과 팝업 운영 기간 동안 내내 음식 생각에, 요리만 했다 보니 팝업이 끝나고 한동안은 집에서 뭘 생각하고 썰고 볶고 끓이기가 너무나도 싫었다. 집에선 대충 고기만 아닌 걸로 배달을 시켜먹거나 하우스메이트가 차려주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다 보니(주로 비빔면이나 볶음밥) 또 그게 습관이 되어버렸다(게으른 습관은 너무도 빨리 자리 잡는다…). 그즈음 이직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식사를 할 일이 잦아졌다. 아직 안 친한 사람들에게 나의 식생활 지향점에 대해 강하게 어필하기가 어려웠고, 대충 얼버무리며 추천하는 맛집에 따라갔다. 회사 적응기가 지나자 일이 정신없이 바빠졌고, 끼니를 대충 때울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채식을 지속하려는 사람' 이라는 정체성은 얕게나마 유지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관련한 프로젝트를 해봤다는 이유로 관련된 소식이나 뉴스에는 계속 관심이 갔고, 비건/채식의 중요성에 대한 콘텐츠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내게 그 주제로 말을 건네는 사람도 많아졌다. 마음먹고 요리하는 날,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날이면 최대한 채식 음식으로 대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누고 싶은 어떤 이야기(=채식 음식, 생각보다 맛있고 어렵지 않다!)가 있다는 건 일상의 여러 순간에 활력을 주었다. 무지 힘들었던 팝업 식당 경험도 시간이 지나고 여러 번 이야기하다 보니 기억이 미화됐다. 친구와 또 한바탕 요리해서 사람들에게 맛있게 먹이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한 번 더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팝업이 끝나고 9개월 뒤

정신을 차려보니, 팝업을 함께 했던 N과 비건 페스티벌 푸드 셀러에 지원하고 있었다.



비건 페스티벌에 푸드 셀러로 나가기


비건 페스티벌은 매년 봄마다(가끔 가을에도) 열리는 행사다. 2016년부터 시작해 매년 방문자가 늘어나고 있고, 4회부터는 1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축제가 됐다. 나는 제5회 비건 페스티벌에 굿즈(채식 실천 유형 에코백) 판매 셀러로 참여했는데, 어느 정도의 경제적 이익, 직접 만든 굿즈를 판매해 수익금 일부를 기부했다는 조금의 뿌듯함, 관심사가 비슷한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즐거움, 영업하는 자아로의 자신감을 주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기회가 된다면 또 참여해보고 싶었지만, 푸드 셀러로 참여한다는 건 함께하는 N이 없었다면 절대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N은 내가 아니었으면 비건 페스티벌의 존재를 몰랐을 거라고 한다). 


요리를 오랫동안 업으로 하고, 당시에도 가게를 운영하던 N은 늘 음식에 대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미 알던 음식도 새로운 조합으로 만들기를 좋아했고, 특히 특이한 소스를 정말 잘 만들었다. 우리는 '사람들 입맛에 어느 정도 익숙하면서, N의 강점인 다양한 소스를 활용할 수 있는 음식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페스티벌에서 비건 브리또(밥과 야채, 살사와 사워크림 등을 또띠아에 싸 먹는 멕시코 음식)를 팔기로 했다.


페스티벌에 셀러로 지원하려면 팀명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충 팀 명을 지었다(내 이름에서 ‘보', N의 이름에서 ‘나' 한 글자씩을 따서 팀 이름은 ‘보나페티’가 되었다). 팀 이름을 지은 김에 인스타그램에 계정도 만들었다. 페스티벌에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까, 명함이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종이로 인쇄하긴 좀 그래서 우리 얼굴을 그린 뒤 밑에 인스타 계정명을 써 도장을 만들고 이면지에 찍어서 가져갈 수 있게 준비했고, 종이 박스를 리폼해 부스 간판과 바람 가림막을 만들었다. 화려한 현수막과 쇼케이스, X배너 등등을 가져온 다른 부스에 비해 우리는... 약간.. 오래전에 했던 레모네이드 팔기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지만..


2019년 비건페스티벌에서의 우리. 이제 브리또 팔기를 시작하자!


엉성하긴 했지만, 이번엔 저번 팝업 경험 같지 않게 나름 역할 분배도 잘하고,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그리고 브리또는 정말 맛있었다. 우유 대신 캐슈넛으로 사워크림을 만들고, 토마토와 멕시칸 고추를 섞어 매콤한 소스를 끓이고, 고수와 파슬리를 갈아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딱히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상큼한 소스를 위에 뿌려주었다. 야채와 곡류도 다양하게 채워주고, 치즈를 못 뿌리니 나초를 부숴 위에 얹어주었다. 구석진 부스였지만 나중엔 사람들이 꽤나 줄 서서 먹을 만큼, 맛이 있었다.


여기서 질문: 장사가 잘 된 우리 팀. 그래서, 이번엔 소꿉장난 같지 않은 수입을 얻었을까?

답: 흑흑


페스티벌 며칠 전, 주최 측에서는 행사 당일 너무 일찍 음식이 소진되는 경우가 많아, 최소 300인분은 준비하는 게 좋다는 안내를 해주었다. 300인분이라니. 30인분도 만들어본 적 없었던 나와 규모가 작은 식당을 했던 N는 대혼란에 빠졌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고, 시키는 대로.. 이틀 전부터 장을 보고 썰고 볶고 버무리고 하며 재료 준비하기 대장정을 행했다. 그리고.. 우리는 결론적으로 200인분 정도를 팔았다. 우리 같은 신생팀은 그만큼의 수요가 없었기 때문도 있지만, 아무리 밑 작업을 다 해왔다 해도 좁은 부스에서 브리또를 말고, 굽고, 종이로 랩핑 해서 주는 과정은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가 300인분을 소화할 수가 없기도 했다. 시간과 양 계산에 실패한 우리는 300인분 어치의 재료비를 써 200인분 어치를 팔았고, 우리는 남은 재료를 보며 약간의 심란함을 느꼈지만.. 그래도 처음 치고는 잘했다고 서로 도닥거렸다(남은 재료는 냉동해두고 한참을 먹었다).

우리가 만든 비건 브리또. 솔직히 정말 맛있었다. 다 N 덕분이다.



다른 기회를 열어준 첫번째 시도


아쉬움은 많이 남았지만, 어쨌든 비건 페스티벌 셀러 경험은 N과의 팀워크가 다져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당일 합이 잘 맞았고, N은 요리를, 나는 그 외의 것들을(여러 가지 정보 찾기, 지원하기, 응대하기, 그 외 운영에 필요한 것들 챙기기) 꽤 잘했다. 강점을 서로가 더 잘 알아봐 준 덕분에 우리는 다음을 긍정적으로 기약할 수 있었다. 브리또는 자부할 만큼 맛있었고, 그 날의 소비자들 중에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꽤 많이 생겼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소스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우리의 음식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 중엔 제로 웨이스트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들도 있었는데, 페스티벌 이후 그분들은 카페에서 준비하는 50인 남짓의 행사에서 제공될 음식이 필요하다며 우리에게 브리또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주었다. 또 그 카페는 포장재 없이 제품을 살 수 있는 리필 마켓(소비자가 용기를 가져오면 제품을 소분해서 덜어 파는 마켓)을 한 달에 한 번 운영했는데, 얼마 후부터 우리는 그 마켓의 정기 셀러가 되었다. 주 품목은 집에서도 쉽게 비건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비건 소스(볶음밥, 파스타, 혹은 빵에 발라먹을 수 있는 페스토나 스프레드, 아이올리 등)들이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용기에 미리 담아 포장판매하는 형식이 아닌, 자기가 직접 유리병을 소독해서 와야하는 번거로운 소비였는데도 사람들은 집에서부터 이런저런 모양의 유리병, 락앤락 등을 바리바리 가져왔다. 일반 플리마켓과는 다른 형태의 장터다보니 마켓을 방문한 소비자들은 집에 가서 쓰레기 없이 장 본 물건들, 소스를 활용해 해먹은 음식을 사진을 찍어 인증하고, '쓰레기 없는 소비 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사람들과 공유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페스토를 여러 사람에게 추천해주기도 했다. 입소문은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마켓이 회차를 거듭할수록 큰 용기를 가져와서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완제품을 판매하는 다른 마켓과 달리, 각기 다른 용기를 마주하고, 100g, 200g씩 덜고, 무게를 재고 하는 과정이 있다보니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많았고, 덕분에 매 달 안부를 묻고 새로운 이야기를 주고 받는 단골도 꽤 많이 생겼다.

소규모 행사를 위해 준비한 비건 브리또 / 매 마켓마다 품절된 우리의 비건 소스


비건 소스는 한번 만들어두면 꽤 오랜 기간 동안 간편하게 활용하기에 좋다. 리필 마켓에 몇 번 참여한 뒤, 이런 강점을 알아본 한 환경 단체 쪽에서 우리에게 ‘소스를 활용해 간단한 비건 음식 만들기’ 워크숍 진행을 의뢰했다. 요리 워크숍을 진행해보는 건 또 둘 다 완전 처음이었는데, 대상이 ‘거의 요리를 안 해 먹는 만 24세 미만 자취생’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게, 소소한 팁들을 공유한단 마음으로 했다. 믹서기를 활용해 비건 소스 만들어 두는 법, 소스를 활용해 간단하게 비건 파스타와 볶음밥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워크숍 이후 정말로 레시피를 활용해 요리를 해 먹고 우리를 태그해 인증해주는 참여자가 많았다. 또 다른 결의 뿌듯함을 느끼는 계기였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요리 워크숍을 진행할 수도 있구나''라는, 또 하나의 일 근육이 생겼다.


파스타와 후무스 플레이트를 만들던 참여자들


소스 프로젝트는 마켓이나 워크숍 같은 게 있을 때만 하는 부업이지만, 신선하고 든든한 또 다른 일 자아가 되어주었다. 한 번씩 마켓에 참여하고, 함께 요리하고, 단골과 이야기 나누는 일은 회사 일과는 완전히 다른 에너지를 쓰는 거였다. 한 번씩 그렇게 전환되는 경험은 지루함을 느끼던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뿌듯함도 꽤 컸다. 채식하고 매번 요리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는 사람들이 “쉽게 요리할 수 있어 너무 좋다"는 피드백을 줄 때면 본업보다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마켓도 페스티벌도 참여를 거의 못했고, 워크숍 운영도 꿈꾸기 어렵지만, 채식 소스 만드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내 일 자아 중에 하나다. 우리는 주변을 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품이 닿게 할 방법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있다. 


상품을 배송하는 식품사업자의 영역은 또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서, 정말 정말 여러 가지 검사와 서류를 넘겨야 한다. 얼마 전 우리는 사업자등록과 검사 합격이라는 한 고개를 넘으며 또 다른 일 처리 경험이 생겼다. 이제는 또 다른 고민과 새로운 일들에 부딪히겠지(예를 들어 포장재와 배송 부분에 있어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지점의 타협점을 찾고 있다). 식품의 제작, 판매 페이지 작성, 패킹, 배송 등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과연 우리의 일 근육은 어떻게 찢어지고 단단해질까. 과연 우리는 소스로 어디까지, 언제까지 뭘 해볼 수 있을까. 우선 스스로 세운 데드라인 좀 잘 지켜봐야지. 아뵤뵤.


검사를 통과한 우리의 페스토 1호.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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