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ye Mar 06. 2020

결혼하지 않고 파트너로 함께 살기

4년의 장거리 연애를 끝내고, 동거 6개월차를 지나며



2019년 9월 어느 날의 우리


애인이자 동거인(파트너)인 사람과 함께 산지도 어느덧 6개월이 되었다. 3년 전 파트너가 부산에 살 때 잠시 내려가서 3개월 정도 산 적은 있지만, 함께 돈을 모아 집을 구하고, 생활비를 걷어 생활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와 파트너는 만난지 4년 반 정도 되었고, 동거 결정 당시에도 이미 서로 귀도 파주고 코도 파주고 다 하는 사이였지만 함께 사는 것은 조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어제 밤에도 살림 시간의 불균형 문제로 파트너에게 한바탕 짜증을 내고, 오늘 오후 쯤 되니 괜히 미안해졌다. 파트너가 좋아하는 냉이된장국을 한 냄비 끓여두고 이 글을 쓴다.


우리는 함께 사는 삶이 간절했다.


우리는 4년 동안 버전3에 거친 장거리 연애를 했다. 내가 동유럽을 여행할 때 한국에 있는 동거인에게 편지를 보내 연애가 시작된 후, 내가 터키에서 아프리카로 옮겨가 여행하는 동안 동아프리카-한국 장거리 연애를 했고(4개월, 시차 7시간), 한국에 와서는 쩌어기 계룡산 자락 서당에서 핸드폰도 없이 살며 한문을 공부하는 동거인과 서울-대전 장거리 연애를 했으며(1년 4개월), 이후 부산에 일자리를 구한 동거인과 서울-부산 장거리 연애를 했다(2년 3개월). 우리가 4년 동안 길에 뿌린 돈을 합하면 꽤 괜찮은 중고차 한대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장거리 연애 초기에 모으던 열차표들. 매번 열차에서 생이별 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던 우리


편의점 캔맥주 번개 한 번 할 수 없던 장거리 연애 4년 동안 우리는 "얼른 같이 살아야 하는데.."라는 말을 8,848번쯤 했고(뻥) 각자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 함께 사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내 인생 최고조로 우울감이 심했던 2017년 대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에 3개월 동안 파트너의 집(부산)에 무작정 내려가 살며 많이 안정을 찾은 뒤, 파트너의 내일채움공제(=노예 계약)가 끝나는 2년 후에는 꼭 함께 살아야겠다고 굳건히 결심했다(당시 부산에서 일자리를 알아봤으나 내 관심사를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없어서 그만두었다).


그 형태가 결혼이든 동거든 상관 없었고, "일단 우리 모든걸 스탑하고 워홀(워킹홀리데이)을 먼저 가서 함께 살아볼까!" 싶어 둘 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신청해보기도 했다(떨어짐).


결합의 형태를 '결혼'이 아닌 '동거'로 택한 이유


동거를 선택한 데는 여러 가지 단순한 이유가 있었는데, 1)나는 비혼 결심까진 없었지만 우선 30대 전엔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며, 2)결혼할 돈(대부분이 준비하는 결혼식, 초기 살림 준비 비용 등)도 없었고, 3)사람들이 결혼의 장점이라고 꼽는 점들을 대부분 동거로 이룰 수 있다고 봤으며, 4)신혼부부에게 오는 정책적 혜택들을 청년 지원 정책으로도 꽤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5)결정적으로 파트너가 갑자기 서울로 이직하게 돼서 결혼이고 뭐고 논의할 겨를도 없이 함께 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사실 선택했다기 보다 그냥 집을 구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동거를 하고 살아보니 3번의 장점이 너무 크고 둘 다 결혼의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못해서 앞으로도 가능한(아마도 아이에 대한 결심이 생기거나, 받을 수 있는 청년 지원 정책을 모두 소진하고 신혼부부 지원으로 연명해야할 때까지) 동거로 살아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본격 동거 준비&실행하기: 이직과 집구하기, 부모님과 합의(?)


사실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면 장소는 상관 없었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것이 주요한 이슈였다. 대학 막 학기때 한동안 파트너의 생활 기반인 부산에서의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문과 대학생인 내가 전혀 연고 없는 부산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기엔 선택지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결국 나는 서울에서 일을 시작했고, 먼저 일을 시작했던 파트너는 부산에서의 일과 생활에 나보다 먼저 지쳐갔다.


우리는 새로운 일상에 대한 후보지들을 즐겨찾기에 넣어두며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자주 이야기 했다. 후보지에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가 있었고, 귀촌이 있었으며, 마지막 선택지로 서울에서의 삶이 있었다. 인문학 관련 일을 했던 파트너는 생판 다른 분야(스포츠)에서도 일을 해보고 싶단 이야길 가끔씩 했는데, 관련 기업들 SNS들을 팔로우하며 계속 지켜보고, 친분을 쌓아 보조로도 가끔 일해보더니 1년 후 서울 지점으로 이직을 하게 됐다. 원래 일하던 곳의 청년내일채움공제가 딱 끝나는 시점이었다.


파트너의 부모님은 파트너에게 "서울로 갈 거면 월세로 말고 전세 혹은 반전세로 가라"며 꽤 큰 금액을 지원해주신다고 했다. 나도 살던 월세 집의 2년 계약이 끝나가던 시점이라 빠르게 중소기업청년전세자금대출을 알아보고 2주 동안 주말마다(+반차를 쓰고) 서울 은평구, 마포구, 서대문구 있는 17개의 전세집을 보고 후다다다 각종 은행 서류업무들을 처리한 후 나의 대출금 9900만원+파트너와 내가 모은 돈+파트너 부모님 지원액을 더해 서대문구에 꽤 훌륭한 조건의 전세집을 얻을 수 있었다(이 과정이 정말 너무 빡셌지만 집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만족한다. 언젠가 이 과정도 정리해보리라).원래 500/40에 버스 종점 꼭대기 집에 살다가, 언덕 아래 산뜻한 쓰리룸 주거 공간으로 와서 이자 10만원만 내면 된다는 사실이 파트너와 함께 산다는 사실보다 달콤하게 느껴기도 했다. 파트너 부모님 만세. 소액이지만 그래도 야금야금 돈 모은 우리 만세. 중소기업청년전세자금대출 만만세. (*중소기업청년전세자금대출은 전세가 2억원 이하의 집에 한해, 최대 1억원까지 대출을 지원해준다. 1번 연장 가능, 최대 4년 까지 가능하고 이후엔 버팀목전세자금대출로 전환 가능하.)


두 번의 계약 취소를 당하고, 최종적으로 우리(내)가 구한 연희동 집. 한 여름에 더위를 먹어가며 구한 이 집 앞,뒤론 산과 천이 있고, 동네엔 좋은 이웃들이 있다.


이직을 결정하고 집을 구하기 까지의 과정이 한 달도 안되게 이뤄졌기 때문에(게다가 우리는 2~3주에 한 번 만났고) 서로의 동거 철학이나 규칙, 부모님 설득 같은 것은 논의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원래도 독립을 했던 상태였고, 살면서 부모님과 중요한 사항을 의논해본 경험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내 동거 결정은 전달 수준에 가까웠다(엄마는 한참 후에 알았다). 파트너의 부모님도 우리가 예전에 부산에서의 단기 동거 경험(당시엔 조금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잘 넘어갔다)이 있기도 하고, '오래 만났으니 뭐 둘이 어떻게 어떻게 잘 살겄지' 하고 별 다른 이야기 없이 동거에 대해 받아들여주셨다. 파트너가 서울로 가기 위해 여태 공부한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로 이직한다는 것과 전세집이 내 명의라는 사실(대출 때문에)을 조금 찝찝해하셨는데 이 부분은 공증을 받기로 하고 넘어갔다.


나는 파트너의 부모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파트너에게 보내주시는 반찬과 과일 등도 맛있게 받아먹고 한 번씩 파트너의 전화를 건네 받아 감사 인사도 전하곤 한다. 하지만 명절에 내려가기, 주기적으로 안부 전화 드리기, 가족 행사에 참여하기 등의 일은 의무적으로 하진 않는다. 그러나 내 명의의 대출을 받지 않았더라면 늘 그 분들에게 어떤 도리를 해야할 것 같은 부채감에 짓눌렸을 거란 생각은 든다. (빚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제적 떳떳함은 정말 중요하다. 다시 한 번 청년전세자금대출 만세..


함께 경제 규칙을 만들고 살림 채우기


이사를 결정하고는 바로 카카오뱅크 모임통장을 개설해 공금 100만원씩을 걷었다. 그걸로 복비를 내고(제일 큰 지출이었다), 이사를 하고(5만원에 해주신 용달 선생님 복받으세요), 생활에 필요한 기초적인 가전제품(중고 세탁기, 청소기 등)과 가구(침대, 식탁)와 집기들을 샀다. 침대와 식탁 외에는 친구들이 가을 맞이 대청소를 하며 버리는 가구(책상, 책장, 거울, 그릇, 암체어 등등)나 동네에 버려진 가구(매트리스와 전신 거울, 미니 책장)들을 주워왔고, 종종 당근마켓도 이용했다.


줍줍 살림살이들. 손님 방에 놓을 매트리스, 암체어, 책상, 책장2개, 그릇, 컵, 수저세트, 거울 등등.. 정말이지 많이도 얻고/주워왔다



이후로는 매월 서로 공금 30만원씩을 걷어서 대출 이자(한 달에 10만원 정도)와 공과금(한 달에 8~10만원 정도), 정기구독료(넷플릭스, 웨이브)를 내고 식비(주에 3~5만원)와 생활지출, 데이트까지 해결하고 있다. 모자랄 땐 서로 조금씩 더 걷거나 내키는 사람이 더 내거나 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부분


나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집에서 음식은 내가 한다. 나보다 청결에 민감한 파트너는 청소를 거의 맡아서 한다. 빨래는 함께, 각종 쓰레기 버리기와 화장실 청소는 주로 파트너의 담당이고 나는 공과금 납부와 필요한 물건 사기 등 공금 관리를 한다(공금 계좌가 내 명의다). 그런데 가끔씩 부아가 치밀었다. 왜냐면 요리와 장보기(및 생활용품 쇼핑), 돈 관리는 상시 점검하고 검색하고 생각하고 채워넣어야 하는 영역이고 청소는 주기적으로 행동 하거나 보이면 하는 영역이라 느껴져서다. 겉으로 보기엔 공평한 분배 같지만 매일 1시간 이상의 가사노동을 하던 나는 최근 "너도 공동생활에 대한 고민과 기획을 좀 해!" 하고 화를 빵 터뜨려버렸다. 우리는 한 번도 맞서 싸운적은 없고 대체로 나만 짜증을 내는 편인데, 내가 한 번 터지고 나면 어쩔줄 몰라하는 동거인이 잠자코 있다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미안했는지 밥하기, 베란다 선반 조립, 대청소를 혼자 다 하던 어제의 동거인 (+겨울 분리수거)


나는 나처럼 중구난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만 단순하게 끝까지 파고 드는, 유행에 휘둘리는 과소비는 일절 하지 않고 검소한, 어떤 상황과 사람을 재지 않고 항상 푸근한 이 사람을 좋아했다. 그런데 함께 살고 보니 이 사람이 여러 갈래로 생각하지 않는게 답답하고, 쇼핑 젬병인 이 사람이 내 돈으로 산 걸 쓰는게 은근히 얄밉고(책, 아이패드, 의류잡화 등등. 이 사람은 물건이 거의 없고 내가 쓸만한 건 더더욱 없다), 모든 일에 "좋구먼~", "에이 아깝구먼~", "그렇구먼~"식으로 대하는 저 태평한 성격에 자주 화가 났다.


파트너도 그럴 것이다. 나는 가벼운 청소를 매일 하기 보다 일주일에 한 번 몰아하는 것을 선호 하고 물건들도 흐트러짐 속의 질서(?) 속에 두는 편이다(맞다. 나는 사실 무척 더럽다). 파트너는 외투가 식탁 의자에 걸려있거나 가방이 소파에 나와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제 자리에 놓는다. 나는 SNS와 온갖 정기구독을 통해 온 세상 소식 가십을 다 받아보는 사람이고 파트너는 끽 해야 포털 인기 뉴스와 직장동료들로부터 얻는 세상사 정보가 전부인 사람이다. 나는 예측과 멀어지는 일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고 파트너는 '흐음, 그렇게 되었군.' 하고 마는 사람이다. 나는 자잘한 소비도 꽤나 좋아하는 편인데, 비슷한 물건이 있어도 가끔 새로운 것을 사며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있어도 새 책을 산다. 파트너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식재료를 사는 데 있어도 간장 기름 식초 설탕 고추장 된장만 들어가는 요리도 다 맛있는데 굳이 홀그레인 머스터드나 멕시칸 이탈리안 향신료를 사야하나..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서로를 약간씩 이상하게 여기며 서로 다른 인간 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다른 부분에 대한 도움을 얻기도 하며, 조율해가고 있다.


우리가 포개지는 부분


여러가지 불협화음도 내고 있지만 함께 사는 일은 백 번 돌이켜봐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나 생활적으로 훨씬 안정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정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나는 매일 안아주는 존재가 일상에 있다는 게 이렇게 까지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전엔 미처 몰랐다. 기존엔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도 정말 심하게 불안했고, 나를 낮춰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만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이제는 어떤 안좋은 상황이 터져도 불변하는 일상의 긍정적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 최악의 상황에도 버티게 할 것 같은 막연한 힘을 준다. 내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을 때 뜨끈한 국 끓여줄 누군가 있는 것도. 또 혼자 살았으면 기운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았을 일들(특히 집안일)을 함께 산다는 일말의 책임감으로 하게 되는 점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혼자할 수 있는 일들도 굳이 마주보고 하면 집중이 잘되는 편이다


서로 관심사는 다르지만 크게 보면 취향이 비슷한 점도 좋다. 처음 이사 하고 나서 서재를 합친 우리는 각자 27년 32년을 살며 이렇게 겹치는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에 놀랐다. 심지어 둘 다 책이 엄청 많은데(책장 3개)... 왓챠 넷플릭스 취향도 마찬가지다. 같은 컨텐츠를 소비하며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다는 건 함께 살기 전에도 그랬지만 동거한 이후에도 큰 아쉬움으로 왔다. 하지만 컨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점은 공통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책 읽는 시간 자주 가진다. 혼자 하던 것들을 마주보고 할 뿐인데 혼자할 때보단 훨씬 집중도가 높아진다(스마트폰을 훨씬 덜하니..). 몸을 움직일 때도 그렇다. 파트너는 격한 등산을 좋아하고 나는 숲에서 산림욕 하며 누워있기를 좋아하는데, 휴무일이면 함께 숲에 가서 나는 슬그멍 걷거나 쉬고 파트너는 쩌어 위까지 뛰어갔다 내려오고를 반복하곤 한다. 파트너 덕에 나는 전보다 산에 훨씬 자주 가고 건강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파트너 덕분에 평생 못타던 자전거를 배우고, 그 시간을 좋아하게 됐으며, 파트너는 나를 통해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에 대해 접한 후 함께 세상을 보는 렌즈 하나씩을 더 닦아 나가가고 있다.


우리는 결국 결혼하게 될까?


우리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쭉 같이 살게될 것이다. 형태는 지금 처럼 동거일 수도 있고, 언젠가는 결혼을 할 수도 있다. 사실 결혼에 대해 어려워하는 쪽은 온전히 내 쪽이다. 나는 아직 가족이라는 단어가 혼란의 세계처럼 느껴진다. 가족에게 내 삶을 휘둘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오래 노력하던 어떤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가정이 불행하진 않겠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 둔기의 무게에 대해 아직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그게 남의 손에 있든, 나의 손에 쥐어지든.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나는 파트너와 함께하는 일상에 길들여지고 있고, 앞으로도 쭉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파트너의 가족까지 그렇게 받아들일수 있을까? 파트너에게 내 가족까지 가족처럼 대해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좋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럴 수 없다. 또한 파트너와 쭉 함께 하고 싶다고 해서 아직 나의 인생 계획의 중심을 그와의 일상에 두고 싶지도 않다. 아니 근데 애초에 결혼과 가족이 갖는 의미와 질서가 뭘까? 앞으로도 명확한 가족관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기 전까지는 파트너와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예 그런 생각을 굳히지 않더라도, 결혼하지 않고 이대로 쭉 잘 살 수 있다면 어떨까. 프랑스에는서는 '팍스'라는 형태로 사는 커플이 많다. 미혼 커플이 배우자 권리를 인정받는 파트너십 제도이다. 팍스를 맺고 사는 커플도 많은 정책적 지원을 보장 받을 수 있고, 세금도 함께 낸다. 다만 재산이 공동 명의가 되는 부부와 달리 팍스 커플의 경우 명시하지 않을시 서로의 재산은 각자에 속한다(*<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p47).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위한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도 내가 파트너와 산다면, 지금과 같은 법제도 안에서라면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등본상 동거인일뿐, 당장 아파서 병원에 가도 보호자로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할지 말지 모를 결혼을 부디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충분히 내 기준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게 되길 바래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래희망이 뭐가 그렇게 별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