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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브 Mar 02. 2023

모든 벽은 문이다

무거운 도시에서 열어젖힌 수많은 문들에 대하여

어떤 장면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나에겐 2018년,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산 TV가 집에 도착한 순간이 그랬다. 함께 살던 룸메이트가 고향으로 내려가 거실이 텅 비던 참이었다. 그 막막한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하다 TV와 소파, 두 가지 물건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았던 집은 TV와 소파는커녕 테이블 하나도 놓기 힘들 정도로 좁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생긴 ‘여분 공간’에 설렜다. 그레이 패브릭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게 나의 오랜 꿈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처음 경험한 주거 형태는 기숙사였다. 두 명이서 한 방을 쓰는 구조였는데 종이 중앙에 물감을 짜고 반을 접은 듯 구조가 정확히 일치했다. 싱글 침대, 머리 위에 수납공간이 있는 책상, 똑같은 연두색 시디즈 의자까지. 실수로 다른 사람의 방에 잘못 들어간다고 해도 눈치를 못 챌 것 같았다. 어쩌면 룸메이트와 의자가 뒤바뀌었는데도 내 것이라 생각하고 쭉 사용했을 수도 있다. 의자에는 이름도, 색깔도 없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상에서 밥을 먹었고 친구가 놀러 오면 침대 한 켠을 의자처럼 내주었다. 스무 살의 첫 독립 공간치곤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어딘가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많은 동네를 거쳤다. 대학로, 정릉, 목동, 지금의 집까지. 방 하나에서 두 개로, 행거에서 옷장으로, 옵션 서랍장에서 5단 책장으로. 공간의 형태는 보다 넓고 단정해졌다. 퀀텀 점프보다는 폴짝 점프에 가까웠다. 놀라울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은 없었지만 한 발씩 조심스레 폴짝 내딛으며 내 취향과 선호를 찾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간 분리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알게 됐다. 각각의 방은 이름표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쉬는 공간, 저곳은 요리를 하는 공간. 침대에서까지 토스트 냄새가 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타인의 공간은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어주었고 친구네 집들이에서도 살림의 지혜를 배워왔다. 그렇게 쌓아 올린 감각이 ‘내 공간’을 향한 애정의 밑거름이 됐다.  


용도가 단일한 물건에 돈을 쓸 때 삶은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 지금까지 내가 쓰던 의자는 공부 의자도, 밥 의자도, 친구 맞이 의자도 될 수 있는 다용도였다. ‘이것도 저것도 된다’라는 범용성은 다시 말해 특출한 강점이 없다는 뜻도 된다. 공부하던 책상 앞 의자를 드르륵 끌어와 밥을 먹어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의자라는 물건의 속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먹고사니즘 그 너머에 있다. 생필품이 아닐지언정 TV를 볼 때는 꼭 전용 소파를 두고 싶었다. 공부와 여가를 분리하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모른다. 허리를 곧게 세우지 않고 해파리 같은 수평 자세로 누워 있어도 되는 소파. 돈을 쓴다면 제대로 쓰고 싶었다. 빔 프로젝터는 빔을 쏘는 것 하나의 기능만 하는데도 한 달 과외비보다 비쌌으니까.


TV로 가장 처음 본 화면은 아카데미 시상식이었다. 매년 2월 LA에서는 전년의 뛰어난 영화를 기리기 위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시상식 전까지 후보작을 최대한 많이 예습하는 게 그 해 나의 리츄얼이었다. 2017년의 영화는 단연 <셰이프 오브 워터>였다. 작품도 훌륭했지만 이 작품을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수상소감이 더 탁월했다. 감독상에 이어 작품상까지 수상한 기예르모는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멕시코 출신 이민자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며 자랐던 어린 시절,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상상도 못 했다. 영화를 꿈꾸는 모든 젊은 제작자여, 세계는 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라. (Kick it open and come in)


수상 소감을 듣고 관객석에서 박수를 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의 말처럼 이 도시는 나에게 ‘문’이었는지도 모른다. TV와 소파를 집에 들이게 된 날, 나는 하나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TV와 소파는커녕 테이블도 놓기 힘들었던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할 벽이었으니까. 너무나 무겁고 단단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기예르모 감독처럼 내 경험 밖의 세상을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들은 만큼만 꿈꿀 수 있는 법이다. TV와 소파를 사고 신나서 찍어 둔 사진은 공교롭게도 내 명의의 집을 계약하고 온 날 <4년 전의 오늘> 알림으로 떴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히 또 하나의 문을 연 것이다.



이제 나는 공부용 책상과 식사용 테이블을 따로 두고 쓴다. 베란다에서만 쓰는 작은 간이 테이블도 있다. 요구르트만 떠먹는 나무 숟가락이 있고, 커피만 담는 예쁜 컵과 소서, 그리고 찻잔만을 보관하는 전용 수납장이 있다. 의자는 뒤섞여도 제 자리를 금세 찾아갈 수 있다. 용도가 단일한 물건에 돈을 쓸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은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간격이 아득할 정도로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많은 것을 ‘퉁치며’ 살았다. 이제는 최소한 1물건 1목적의 삶은 달성했다. 다음은 또 다른 문을 열 차례다. 지금 내가 벽이라고 느끼는 수많은 장애물들도 결국엔 문일 테다. 수많은 문을 버겁고도 통쾌하게 열어 왔기 때문에 선험적으로 확신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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