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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May 18. 2020

욕망이 이끄는 삶

소우주(小宇宙)

  회사가 이사를 했다. 명동 한 복판, 남산 스테이트 타워로! 그간 회사의 규모와 명성에 맞지 않게, 소공동 지하의 열악한 사무실을 개보수해가며 운영을 해왔는데, 계약 만료와 함께 드디어 이사를 했다. 전면이 유리로 된 크고 높은 건물에 로비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비싼 디자이너 가구가 놓였고, 아침에 책상에 내 ID 카드를 갖다 대면 자동으로 내선번호까지 세팅이 되는 자율 좌석을 갖췄다. 도시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가 그야말로 ‘도회적인’ 공간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설레는 일이지만, 이 건물은 특히 더 의미가 있다.



  예전 회사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발버둥 치던 시절, 당시에 남산 스테이트 타워 1층에는 ‘보버 라운지’라고 하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기분 전환 겸 엄마와 여동생을 불러 식사를 했었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그에 따라주지 못해서 무진장 스트레스를 받던 기간이었는데, 밥을 먹고 그 멋진 건물을 나오면서 엄마에게 “도대체 이런 멋진 건물에서는 누가 일하는 거야? 왜 난 이런 데서 일을 못하는 거야?” 하고 푸념을 했었다. 그게 불과 3, 4년 전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내가 “남산 스테이트 타워에서 일하는 사람”이 돼 있다니! 이번 사옥 이전이 내게 더 뜻깊은 이유다.


  솔직히 말하면 (이 말을 꼭 붙여야 한다) 난 세련된 게 좋다. 생산성 높고, 효율적인 게 좋고, 편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게 좋다. 사람들이 반하고, 감동받고, 기꺼이 돈과 시간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멋진 것이 좋다. 그래서 효율이라는 큰 축 아래, 고객이 기꺼이 돈과 시간을 지불하도록 감동을 만드는 마케터라는 직업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지금에야 이렇게 솔직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이래도 되나?’ 싶은 자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좇는 욕망이 천박하고 미천한 것으로 둔갑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화려하고 예쁜 걸 좇는 역사는 길고 길어서 멋진 콘도와 예쁜 커피숍에서 사진을 꼭 찍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다섯 살 시절을 지나, ‘경양식’ 집에 집착했던 초등 시절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 근처의 예쁜 카페를 도장 깨기 하듯 다니고 싸이월드에 사진을 찍어 올리곤 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내가 다니던 학교의 인문대에는 여전히 운동권의 반(反) 자본주의 문화가 남아 있었는데, 한 선배가 내가 싸이월드에 올린 카페 사진을 보더니 ‘사치 부리는 된장녀’라고 평가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게다가 그 선배는 내가 친구들과 호텔을 빌려 파자마 파티를 연 것을 보고는, “하루 지출 얼마?” 하고 비아냥거리며 댓글을 달기도 했다. 내 성격에 묘한 도덕적 우월감과 비난의 뉘앙스가 뒤섞인 그 댓글 하나로 자아비판에 빠졌을 리 만무하지만, 여전히 그 사건이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어린 마음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첨단의 멋진 빌딩이 좋고, 화려한 도시의 생활이 좋고, 편리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게 좋다. 인문학 전공자라는 자의식, 그래도 한때는 정의로운 기자를 꿈꿨던 과거의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내 욕망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게 명쾌한데, 세상의 기준에 맞춰 있는 걸 없다고, 없는 걸 있다고 하기가 더 자신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인간은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산다는 것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일찍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will to life, 쉽게 말해 ‘욕망’)가 지배한다고 했다. 내가 좋은 걸 좋다고 이야기하는데, 어쭙잖게 정치 사회적 맥락을 의식한 복잡한 변명은 내려놓기로 한다. 내일 또 멋진 빌딩에서 성실히 시간을 나는 일개미를 꿈꾸며, 이제 출근 준비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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