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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May 10. 2020

‘타자(他者)’의 이해

Lesson Learned

  2013년 여름, 여동생이 갈 곳 없는 말티즈라 해서 데려와 한 가족이 된 ‘또또’는 지난해 11월,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또또는 집안 식구 그 누구보다 예민했는데, 젖은 잔디는 절대 안 밟고, 자기가 좋아하는 간식만 먹고, 버릇을 고친다고 하루를 꼬박 굶겨도 맛없는 사료는 입에도 안 댔다. 발만 만져도 으르렁댔고, 사람 손타는 것도 싫어해서 사람 무릎 위에 폭 안겨 있던 것도 손에 꼽는다. 처음 우리 집에 데려왔을 때에는 거의 3일간 잠을 못 자고 밤을 지새웠다. 강아지가 예민하니, 온 집안 식구들이 상전 모시듯 떠받들 수밖에 없어서 나는 곧잘 또또를 두고 “프린스”라고 부르곤 했다. 심장병은 심장이 비대해져서 제 기능을 못하고, 피를 역류시키는 병이라, 절대 흥분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는데, 또또는 별 것도 아닌 일에 하루에도 열두 번 짖고 으르렁댔고, 검진을 위해 병원에 가면 온 몸에 마비가 온 것처럼 몸이 굳어 벌벌 떨곤 했다. 동물 병원 의사들도 또또가 너무 예민한 성품이라 더 증세가 악화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말기에 주 양육자였던 여동생은 숨을 못 쉬어 헐떡이는 또또를 보면서도 병원에 데려가서 더 흥분해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고 병원에 데려가는 일조차 망설였다. 아직도 온 가족이 또또를 추억할 땐 “그렇게 예민한 강아지가 또 있을까” 하며 혀를 끌끌 차곤 한다. 사실은 그 예민함마저 너무 사랑했고, 단 한 번도 순종적인 적 없었기에 더 그립다.


예민 보스 김또또. 늘 인상 쓴듯한 미간이 너무 그립다.
꼭 인형처럼 예뻤지. 이렇게 예쁜데 남들 눈엔 '평범한' 강아지로 보이는 게 이해가 안 됐던 도치 가족.


  또또가 떠나고 난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빠네 공장에서 오랜 시간 떠돌던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왔다. 이름은 누리. 세상 좋은 것 다 누리라는 뜻으로 엄마가 지었다. 사실 또또도 유기견이었지만, 누가 봐도 말티즈라 견종을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 누리는 어떤 견종인지조차 파악이 어려운 믹스견이다. 두툼한 엉덩이를 보면 웰시코기의 피가 섞인 건 분명하고, 뾰족한 코는 꼭 진돗개 같다. 누리는 처음 온 날부터 자기 집인 양 편하게 잠을 잤고, 몇 시간이고 사람 품에 안겨 있는 걸 좋아한다. 또또는 털 깎을 때마다 물고, 짖고, 마비된 듯 몸에 힘을 줘서 꼭 전쟁 같았는데, 누리는 털 깎는 도중에 잠이 들 정도로 태평하다. 또또는 점프를 해서라도 꼭 피하려고 했던 젖은 잔디 위를, 누리는 신나게 뒹굴고 때때로 진흙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엄마와 여동생은 누리를 보면서 “이렇게 순한 강아지라면 10마리도 키우겠다”며 또또와 비교하곤 한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초예민했던 또또와 태평한 누리가 이렇게나 다른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또또처럼 털 갈이를 하지 않는 말티즈류의 강아지들은 보통 예민한 성품을 타고난다고 한다. 털에 뭐라도 붙으면 그걸 떼어낼 수가 없으니 젖은 잔디는 물론이고, 사람 손타는 것도 극도로 경계한다는 거다. 털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반면에 누리는 털 갈이를 하는 종인 것 같은데, 이런 종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성품을 갖는다. 실제로 누리가 산책 중에 진흙 속에 빠진 날, 남동생이 기겁을 했는데 누리가 몇 번 몸을 털어내고 나니 진흙의 흔적이 감쪽 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외부에 대한 경계가 느슨하니, 성품도 태평하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진화(進化)의 관점에서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걸 알고 나니,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는 또또와 누리를 비교하는 일을 조금 덜 하게 됐다. 그만큼 그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너무 미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사람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납득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왜’ 하는지에 대해 알고 나면 미움이 조금 가라앉는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찾아내는 일을 곧 이해라 부를 때가 많다. 신기하게도 절대 납득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도 “그래서” 저렇게 행동한 거였다는 걸 알고 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보통 납득할 수 없다는 게 내가 알던 세계와 완전 다른 일을 맞닥뜨리는 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이고, 이유를 찾다 보면, 무언가를 ‘알아’ 냈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지며 안정이 되는 원리인 것 같다. 사회생활도 내공이 쌓이다 보니, 이제는 회사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처사를 마주했을 때, 습관처럼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먼저 찾곤 한다. 또또와 누리가 그렇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내고 나니, 비교가 덜해진 것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수고도 결국 회사에서의 나를 더 단단하게 하고, 지키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이유를 포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 여부를 따지는 건 선택의 문제다. 이유를 찾고,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무조건 상대를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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