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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onica May 03. 2020

세상의 모든 ‘민하’들에게

Lesson Learned

  격리 생활이 길어지니,  보던 드라마를 보게 됐는데, 요즘 습관처럼 보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퇴근 준비하고 신나게 나가다가도 응급 환자  받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의사들의 치열하고도 지리한 직업윤리에 대한 묘사가 좋아서 정을 붙이게 됐다. 작가 특유의 넘치는 감상과 이상적인 ‘착함 여전히 적응  되지만, 어쨌든  편에   장면은 마음을 울리곤 해서 아직까지는 빠트리지 않고 본다.


  이번 주 목요일에 방영된 8화에서는 산부인과 레지던트 ‘추민하’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시간을 성실히 채워가는 것만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만 바보 되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온다. 보통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체력까지 좋아서 아무리 야근을 해도 쓰러지는 일도 없고, 갑작스러운 휴가나 휴직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일 때문에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원칙을 갖고 매일을 성실하게 보내지만, 인생은 때때로 불공평해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자에게 더 많은 일이 주어지곤 한다. 일의 책임이 커지는 것은 노력의 대가라 여기며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만, 때로는 얌체처럼 불성실한 동료들의 일까지 쳐내며 부당함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나에게는 원망스러운 존재지만, 그렇다고 얌체 같은 동료에게 늘 합당한 벌이 내려지는 것도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8화에서 ‘추민하’ 선생도 내게는 얌체 같지만 남들에겐 천사 같은 동기를 만나, 산부인과의 모든 잡무를 홀로 쳐낸다. 동기는 하필 몸도 마음도 약해서 모든 책임을 뒤로한 채 잠수를 타고, 동기 몫까지 대신해 매일 당직을 선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친한 간호사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것뿐이다. 결국 며칠이 지나 잠수를 탔던 동기가 돌아왔을 때, ‘추민하’ 선생에게 모든 감정을 이입하고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나는 분명 ‘복수’를 바랐었다. 사회 초년생 시절, 책임을 다하지 않고,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자기 어필과 포장에만 급급했던 동료를 보며 부당하다 느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하소연’ 뿐이었던 나를 대신해 시원하게 따져준다든가, 아니면 조교수의 힘을 빌어, 제대로 불이익을 주는 장면을 내심 기대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원한 복수는 없었다. ‘민하’는 묵묵히 동기의 일을 다 해내고, 위기의 산모를 구해낸 후 조교수를 찾아 가 “섭섭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감정을 털어낼 뿐이다.


친한 간호사에게 동기와 조교수 하소연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날 출근. 모든 '성실러'들의 숙명이다.


  수술이 끝나고 자신을 찾아온 ‘민하’에게 ‘석형’은 말한다.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보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 좋다”고. 결국은 “(그렇기에) 좋은 의사가 될 거”라고. 하루는 짧고, 당장 내일은 보이지 않아서 늘 불안해했던 시절. 자기 책임을 팀원들에게 떠넘기고 도망쳤지만, 나와 비슷한 평가를 받았던 동료. 성실하고 우직하게 일하는 게 미련하게 보이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나날들. ‘민하’가 그랬던 것처럼 내 인생엔 처절한 복수도 없었고, 대단한 반전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안다. 하루는 짧아도 인생은 길어서 묵묵히 소처럼 보냈던 그 시간들이 결국 내 몸에 아로새겨져 빛나는 내일을 만들어준다는 걸. 시간을 성실히 나는 것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다른 단단한 자신감이 우리에겐 있다는 걸. 오늘도 하소연으로 화를 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성실한 하루를 나는 모든 ‘민하’들에겐 시간이 주는 든든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이 땅의 모든 '민하'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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