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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soo Kim Jun 13. 2021

피해자의 눈물 한 방울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무엇을 얼마나 물어보아야 하는지는 정말 민감한 문제이다. 


몇 년 전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가 판사로부터 신문을 받은 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판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거짓말장이 취급하는 바람에 심한 수치심을 느꼈고, 수치감을 견딜 수 없어서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서 과연 판사의 신문이 정당했는지, 피해자는 정말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인지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반향은 전국의 온 법정으로 소리없는 물결처럼 번져갔다. 먼저 법정에서 판사가 변호사의 신문을 제지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변호사는 신문사항을 작성하는데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 장소에 간 것인지, 그 장소에서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 물어보아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데, 다 물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 물어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피해자를 모욕하는 신문, 법정에서 피해자를 모욕하고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신문이 행해진다면 피해자가 진실을 제대로 말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신문과정에서 피해자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가 생기게 된다.


피해자는 2차 가해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법정에 선 판사가 이런 위험성에 압도된 나머지 법정에서 피해자의 신빙성을 체크해보는 신문을 하지 않거나, 피해자의 신빙성을 점검해 보려는 변호인의 신문을 제지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피고인이 피해자가 받았던 절망감과 똑 같은 절망감을 마주하게 된다. 피고인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으로 믿었던 법원에서 받은 절망감으로 인해서 법원에 대해서, 그리고 법원에 그 권한을 준 사회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고 이어서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결국, 성범죄 사건에서 어떤 것을 얼마나 물어볼 수 있는지는 일의적으로 판단될 수가 없고, 개개 사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판사는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우면 진술하는 사람이 피해자이건 피고인이건 관계없이 그 신빙성과 관련된 신문을 검사와 변호인에게 허용해야 하고, 때로는 판사 자신이 직접 물어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신문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당혹스러운 신문인지와 관계없이. 그 신문을 통해서 법정에서 진실과 억울함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례를 한 번 보고자 한다. 


성년 삼촌이 미성년 조카를 강간하였다고 기소된 사건인데, 성년 삼촌과 미성년 조카의 나이 차이는 많지 않았고 친구처럼 어울려 지내던 사이였다, 성관계가 있었던 사실은 모두 인정하는데, 성관계의 합의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이었다. 


친족간 성관계이고 피해자가 미성년자임을 감안하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피고인과 피해자가 워낙 이성에게 인기가 많고 서로 특별하게 의지하던 사이였던데다가, 피해자가 사건 전후에 한 행동들을 보면 성관계가 강제력에 의한 것인지 의문이 가는 사건이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유죄를 100% 확신하고, 어떤 사람은 무죄를 100% 확신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 1심에서 피해자 모친의 극렬한 반대로 피해자 신문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피고인에게 7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법정에서 법관이 피해자의 진술을 직접 확인해 보지도 않고 심증을 형성하여, 피고인에게 중형을 선고한다는 것은 사실 너무 위험한 일일 뿐만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 사건의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이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안 단 말인가?


법관이 기록만 보고 그 날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판단한다는 것은 선무당이 사람잡는 일이고, 술 취한 장비가 애 꿎은 사람들 앞에서 장팔사모 함부로 휘두르는 일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이 가려져 있지만, 그건 당사자가 어떤 사람인지 고려하지 말고 판단을 하라는 의미이지, 앞을 보지도 않고 한 손에 쥐어진 칼을 마구 휘두르라고 그 눈을 가려놓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심 판사도 나름대로 곤란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당시는 위에서 본 사건, 즉 피해자가 판사의 신문이 있은 뒤 자살한 사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고, 성범죄에 대한 비난이 또 다른 사건으로 인해 급증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러가지 의혹이 섞여 있는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도 없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 그리고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한 것은 잘못된 일임에 틀림없었고, 이러한 잘못은 항소심에서 반드시 시정되어야 했다.


항소심은 사실심의 최종심이므로 항소심에서 사실관계를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 피고인은 사실상 구제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안이 이러했기 때문에, 필자는 항소심 재판부에 반드시 피해자 신문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력하게 어필하였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피해자 신문도 없이 7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된 점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검사에게 피해자 출석을 독려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고, 검사가 피해자와 모친을 설득하였다.


피해자 신문은 특별히 공개된 법정이 아니라 피해자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될 수 있는 판사실 부속실애서 하기로 하였다. 피해자와 모친은 그 곳에서의 신문은 동의하였다. 


신문 당일 피해자는 장소가 공개법정이 아니어서인지 생각보다는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피해자 모친이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신문을 하면서도 내 머리속에 '과연 하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망설이게 하는 신문사항이 하나 있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신문인데,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여자인 특히 미성년 여자인 피해자에게 물어보게 되면 피해자가 성적인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는 신문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필자는 필자의 신문순서에서 그 신문을 하지 못했고, 재판장의 신문도 끝나고 나서, 재판장이 '더 물어 보실 것은 없나요?'라고 하는 마지막 순간에야 그 신문을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물어보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변호인으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의무감때문이었기도 하고, 내 손을 거쳐간 사건에서 억울한 피고인이 생긴다면 내가 느낄 양심의 가책을 이후에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낀 절박감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건 법정의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질문을 받은 피해자는 잠시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전 질문까지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 방안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피해자의 얼굴에 쏠려 있는데, 피해자의 두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르 떨어졌다. 


그 눈물과 함께 피해자가 진술한 말을 여기서 옮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피해자가 눈물과 함께 내 놓은 말 한마디는 그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날 그 장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해 주었다. 


법정에는 고요함이 흐르고 그 이전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목의 핏대까지 세워가며 호소하던 피고인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그 법정의 문은 닫혔다. 그 전까지 그렇게도 변호인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편지를 보내오던 피고인도 그 이후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진실은 스스로 말한다. 라는 유명한 말은 들어보신지가 있는지?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만, 진실은 진심으로 말을 걸어주는 사람에게만 대답을 한다.


진실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끔 법원에서 진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때로는 진실에게 말해주기를 진심으로 부탁하여야 한다. 그 때 진실은 말을 하고 비로소 정의가 바로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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