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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리 Nov 29. 2023

일과 출산은 선택의 문제일까?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를 생각하며

남편은 해외 사업부이고, 나 역시 해외 홍보 업무를 맡고 있어서 둘 다 출장이 잦았다. 남편은 한 번 출장을 나가면 기본 한 달이었고, 나는 한두 달에 한 번꼴로 출장을 다녔다. 


결혼 후 첫 새해. 시부모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떡국을 먹으며 새해 덕담을 전하시는 아버님. “내 올해 소원은 별거 없다. 너희들 하는 일 다 잘 되는 거랑 손주 보는 거다 허허허. 요새 일하러 나가면 김 계장이 맨날 손자 사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는데 얄미워 죽겠어. 허허” 


내 나이가 비록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아직 출산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가장 친한 친구는 벌써 애가 셋이다. 친구들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축하 선물을 보내고, 진심으로 기뻐해 줬지만 나도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잘 와닿지는 않았다.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라 뜨는 영상들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한 산부인과 채널의 영상이 뜬다. 안경을 쓰고 진중해 보이는 인텔리한 이미지의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요즘 늦게 결혼하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 출산 연령도 전체적으로 높아졌습니다. 30대 중반 넘어서 임신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의사로서 희망을 드리는 말씀을 드리면 좋겠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성이 30대 중반이 넘으면 가임력이 매년 쭉쭉 하락합니다.” 


탤런트 김용건 씨는 76세의 나이에도 득남을 하셨다는데, 여자의 출산 기능은 그렇게 유효기한이 짧다고? 억울함과 동시에 잠시 위기감이 들었다. 


과연 아이를 갖지 않고 나이를 먹었을 때,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면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지금 차장 승진이 코앞인데 당장 임신하고 육아휴직까지 다녀오면 승진은 영영 미뤄져 버릴 텐데. 자연스럽게 생기면 모를까 애쓰진 말자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맡고 난 뒤로 7-8년간, 큰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나는 심각한 생리 불순을 겪어왔다. 아니, 일이 바쁠 땐 어김없이 생리가 세 달 가까이 끊겨 버렸다. 큰 일을 앞두고는 스트레스와 예민 지수가 극에 달했고, 1년 내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경은 늘 곤두서 있었다. 내 욕심에 일을 더 완벽하게 하면 할수록 주변의 기대치는 당연한 듯 높아져갔고, 나는 내가 쌓아온 높디높은 담벼락 위에서 매일을 가슴 졸이며 일했다. 게다가 남편과 환상의 콤비로 번갈아가며 출장을 다니니 결혼 후 임신을 진지하게 준비할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만약 임신을 하게 된다면 나는 지금의 일을 누군가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었다. 배부른 여자가 열두 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먼지 풀풀 날리는 행사장 공사를 새벽까지 감독하고, 몇 날 며칠을 서서 사람들을 응대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 왔다 갔다 한다면 보는 사람들이 더 불편해할 것이 뻔했다. 임산부로서 회사에서 배려를 받게 된다는 것은 곧 비임신 상태에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치를 100% 발휘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순간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좀처럼 되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꾸준히 인정받게 되면 최종적으로 이루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회사 사람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이 과장이야말로 언젠가 여성임원에 어울리는 인재지.” 그런데 내가 목표하는 것이 정말 저 자리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10년 넘게 회사라는 조직을 관찰해 보니 조직장이 되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일을 잘하는 사람과 윗선의 지시를 군말 없이 잘 따르는 사람. 일을 잘 하는 유형은 팀장까지는 기회를 무난히 얻었지만,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자기 주관대로 일을 밀어붙이는 경향이 강하면 그 이상의 기회는 얻지 못했다. 윗선의 지시를 군말 없이 잘 따르는 유형은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예스맨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가치판단 없이 일을 받아와서 던져버려 조직원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꾸준히 오래갔다. 일은 잘 하지만 자기 주관이 강한 유형이 임원이 되면 일정 직급 이상 올라가는데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 보였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 회사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롱런하는 유형은 윗선의 지시에 따라 충실히 일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어쩌면 일에서의 성과보다도 더 중요한 요소로 보였다.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굳이 따져보자면 예스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바른 소리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성장해 온 동력이었지만 훗날 그것이 조직 안에서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조금씩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일은 보람차고 재미있었지만, 어떤 일은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이나 가치창출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시간과 예산을 써야 할 때 나는 상당한 무력감을 느꼈다. 직급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런 종류의 일들은 점점 많아져 갔다. 나의 에너지가 불필요한 곳으로 끊임없이 낭비될수록 회의감은 커져만 갔다. 


10여 일간의 해외출장 후 멍한 머리로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하루는 단단히 몸살이 났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일들 속에서 도무지 휴가를 낼 여유가 생기지 않아 버티고 버티다가 종종 방전되어 버리곤 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급히 오전 휴가를 내고 끙끙대던 중, ‘내가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일하는 거지?’ 라는 진지한 고민에 휩싸였다. 회사에서 목표할 수 있는 것을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내가 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일까. 


지금 잡은 것을 움켜쥐느라 다른 것을 잡을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 일,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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