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힐.
내 기억속 일본에서의 캠핑은 이번 규슈 투어를 포함하여 고작 두번밖에 되지 않는다.
한번은 10여년 전, 후지산 아래의 후모톳바라였다. 비가 억수처럼 내렸고 당시엔 캠핑의 ㅋ자도 잘 몰랐던 때라 죽어라 힘들었던 기억만이 조금 남아있다. 만약 당시의 내가 캠핑을 곧잘 즐기던 캠퍼였다면 그것마저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캠핑을 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배수로를 깠던 기억이 자꾸만 머릿속에 멤돈다.
이번 투어는 캠핑을 할만큼 했고 어딜 가도 알아서 할 정도로 짬빠가 붙은 상태였기에 캄캄한 상태에서도 큰 무리가 없었다. 심지어 텐트를 두개나 쳤고, 난로를 조립했고, 한국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긴 장작을 사이즈에 맞게 토막내기도 했다. 모두가 백패킹 세팅으로 왔기에 모닥불을 피울 도구조차 없었는데 내 텐트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인 일행들과 맥주 한잔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우리가 아는 캠핑이라면 밤 10시나 11시를 전후로 매너타임이 적용된다. 매너타임. 좀 이상한 단어이지 않은가? 그 시각 이후로는 조용히 하자는 의미인데, 대체 여기는 왜 우리가 들어왔을 때부터 조용했던 건데? 응?
낡이 밝고 다른 캠퍼들이 나가고 다시 들어오는 것을 모두 목격하면서 그제서야 일본 캠퍼, 캠핑장의 특성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나는 스피커라는 물건과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다. 함께 사는 여자친구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두개나 갖고 있지만 나는 평소 음악도 잘 듣지 않아서 당연히 내 소유의 스피커 따위는 없다. 그러다보니 여자친구와 함께 할 때를 제외하면 캠핑 때 인위적인 소리를 내는 물건이 존재할 수가 없다. 한번은 일 때문에 억지로 캠핑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 평가전을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술에 취해서 떠드는 소리, 응원하는 소리, 골을 넣었을 때의 환호성, 어렴풋이 들리는 티비 중계 소리 등... 참으로 곤욕스러웠다. 음, 나는 캠핑을 하면서까지 축구를 볼 정도로 열성적인 팬은 아니니까 그것 나름대로 꽤 스트레스였다.
국내 대다수의 캠핑장을 가보면 그 정도로 밤 늦게 떠드는 소리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고작은 음악소리는 얼마든지 흘러나온다. 다들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그 시간에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음악을 트는 것?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보다 일찍이 캠핑 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에서 캠핑을 직접 해보니 가까운 두 국가의 캠퍼들의 성향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나치도록 조용했고, 당연히 음악소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인들과 술을 마신다고 하더라도 우리처럼 웃고 떠드는 모습이 결코 아니었던 거다. 나는 그 모습이 퍽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캠핑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술을 즐기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사진자료가 많이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목격한 일본 캠퍼들 텐트의 약 80% 정도가 TP텐트였다. 우리나라 캠퍼들은 TP텐트를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닌데 일단 실내에서 활동하기 불편하기 때문인 게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벌려놓기 좋아하는 특성상 죽는 공간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한몫한다. 그런데 왜 일본캠퍼들은 TP텐트를 좋아할까? 이 의문에 좀 더 힘을 실을 수 있었던 데는 도쿄에 살면서 한달에 최소 두번은 캠핑을 하러 교외로 나가는 지인에게 물으면서 좀 더 확실해졌다. 그는 한국에서도 익히 잘 알려진 텐트마크디자인의 서커스TC를 사용한다고 했고, 캠핑장에 온통 뾰족이 투성이라고도 했다.
일단 TP텐트는 다른 어떤 텐트보다도 디자인적으로 훌륭하다. 가장 완벽하고 안정적인 구조의 도형이 삼각형이라고 했던가. 실제로 TP텐트가 악천후에서 가장 견고하고 바람에도 강한데 이 모두가 뿔 모양의 삼각형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피칭을 했을 때도 다른 텐트에 비하면 뭔가 구조적으로 안정감이 든다. 무엇보다도 TP텐트는 별 것 아닌 도구들로도 그럴싸하게 '간지'를 뽐낼 수 있게 한다. 비록 텐트 안에서는 허리를 펴는 게 무리일 지라도 말이다. 일본 캠퍼들이 TP텐트를 좋아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한국 캠퍼들이 실용성과 활용성에 중점을 둔다면 그들은 간지를 챙기는 데 진심을 다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게 참 일반화를 할 수는 없는데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대부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파는 나무장작은 보통 참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하여 굵고 실하다. 대부분 30cm 길이로 잘라 판매하니 어지간한 화로대나 난로 사이즈에 딱이다. 그리고 캠핑장 뿐만 아니라 캠핑장이 있을 법한 시골 어디에나 들러도 비슷한 종류의 장작을 구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쿠주 코겐 코티지 캠핑장을 나와 차로 5km정도 산을 내려오면 제법 큰 휴게소가 하나 있다. 작은 편의점이 하나 있고 식당 두어곳, 주유소도 있어 오갈때 몇 번 들렀다. 처음 그곳에서 장작을 파는 것을 목격하곤 사려고 했다가 이내 관뒀는데 이유는 장작이 너무 길어서였다. 길이가 족히 50cm는 될 법했고 대충 들어도 5kg 정도 밖에 안 되길래 적절치 않아보였다. 캠핑장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장작을 판매하길래 굳이 멀리서 살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마키 히또쯔 오네가이시마스."
직원이 친절하게 장작이 놓인 곳까지 나를 안내했는데. 아... 역시 아까의 그것들과 같은 사이즈로 판매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사진을 찍어놓지 못해 아쉽다. 톱으로 썰고 발로 밟아 쪼개고 별의별 쇼를 다 했는데 문제는 길이가 아니었다. 너무 얇아서, 너무너무 얇아서 금방 다 타버리는 바람에 장작 소비가 평소보다 배 이상 빨랐다는 것. 한국에 돌아와서 안 이야기지만 일본 목재 가격이 꽤 비싸서 캠핑용 나무장작을 한국처럼 판매하기 어렵다는 사실. 참나무로 10kg짜리 판매하면 대충 4-5천엔 정도는 될 거라나 뭐라나. 아참, 캠핑장에서 판매했던 장작은 1천엔이었다. 아무튼, 일본에서 캠핑을 할 계획이 있다면 장작만큼은 실망할 준비를 해야만 한다.
한국에서 캠핑을 할 때 가장 편한 점은 항상 쓰레기장이 존재한다는 거다. 노지를 가지 않는 이상 웬만하면 쓰레기를 캠핑장에서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캠핑장엔 쓰레기를 버릴 곳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면 무조건 챙겨가야만 한다는 거다. 물론, 자판기 옆엔 타지 않는 쓰레기(유리병, 페트병, 캔)를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이 있지만 그건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에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캠핑을 하다보면 온갖 비닐류부터 플라스틱, 병, 캔 등의 쓰레기가 나온다. 나름대로 분류해서 쓰레기 봉지를 들고 캠핑장을 활보한다면 그들로부터 딱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쉽다. 우리는 다행히 에스코트 했던 가이드 님이 쓰레기를 처리해주셨는데 사실 이것도 맞지 않는다. 호텔로 들고 오든, 쓰레기 처리장을 찾아가서 버리든 반드시 갖고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 것. 참고로 나는 타는 쓰레기(일본은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으로 분류한다)는 죄다 난로에다 태워서 버려야 할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일본 원정캠핑을 하려는 사람을 위한 팁
1. 자잘한 캠핑용품은 일본 현지에서 조달하는 게 낫다.
- 화로대, 버너, 팩, 망치, 코펠, 컵 등은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싸다. 특히, 스노우피크... 예...
- 텐트 기추할 계획이 있다면 역시 일본에서 사서 캠핑을 떠나는 것을 추천한다.
세일을 진짜 자주 한다. 특히, 스노우피크는 당연히 한국보다 제법 저렴한 편이고, 다른 일본 브랜드 역시 한국보다 싸다. 여담이지만, 텐트는 웬만하면 이름 있는 제품을 쓰는 게 이중지출을 막는 길이다.
- 제대로 된 침낭이 없다면 '난가' 제품을 산다는 생각으로 용품점을 방문하면 좋다. 몽벨도 한국보다 싸다. 나는 몽벨 EXP를 사용 중이다. 존나 좋다.
- 부탄가스나 이소가스는 캠핑용품점엔 당연히 판다. 하지만 편의점이나 마트에는 없다. 부탄가스는 종종 있는데 이소가스는 거의 대부분 철물점에서만 판다. 마트 가서 이소가스 없냐고 물어봐도 직원들은 그게 뭔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
2. 헬리녹스는 일본에 다 있다.
한국에서 헬리녹스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걱정마라. 애국하고 싶다면 좀 더 비싸게 일본에서 사면 된다. 당신이 갖고 싶었던 모든 헬리녹스 제품이 다 있다. 나도 살짝 고민했다.
3. 캠핑장은 24시간 매너타임이다.
위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다. 일본 캠핑장은 24시간 매너타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스피커, 고성방가 댓츠노노.
4. 간지에 신경써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K캠핑을 뿌리고 오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일본 캠퍼들 사이에서 주눅들고 싶지 않다면 입는 것부터 신경 써야한다. 진짜다. 참고로 경험있다...
5. 체크아웃은 11시다. 똑같나?
6. 백패킹이나 모터캠핑에 목숨 걸지마라. 일본애들도 대부분 오토캠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