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비령 Jan 27. 2023

저도 인터넷에 물어봐야겠습니다

상식적인 내 질문에 대한 소아과 의사의 답변

큰딸이 올해 열한 살이 되는 큰 손주를 낳고 산후조리를 하러 우리 집에 머물 때 일이다. 유난히 모든 일에 까탈스러운 딸의 성격대로 신생아를 돌보는데도 자기 나름의 원칙이 많았고 그의 성격을 알기에 웬만하면 맞춰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내가 아주 무식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할미가 된 것 같았다. 나도 한 때는 유명세를 날리던 '이대 나온 여자'인데 ㅎㅎ.  

제일 처음 부딪힌 일은 아가가 딸꾹질을 할 때였다. 우리 때는 딸꾹질을 하면 보리차를 먹이는 게 상식이기에 그렇게 하려 했더니 딸이 질색을 한다. 인터넷에서 먹이지 말라했단다. 우리 때는 목욕 후 구석구석 존슨 앤 존슨 베이비파우더를 정성스레 발라줬는데 그것 역시 안된다며 이름도 낯선 보습용 베이비 로션을 발라줬다. 몇 번이나 나의 경험과 상식이 묵살당하고 난 후 신생아 정기검진에 따라갔다가 담당 선생님을 만나서 물어봤다. '선생님, 보리차를 먹이면 안 되나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 답변이 이랬다.' 저도 인터넷에 물어봐야겠습니다' 씁쓸하기 그지없는 명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 딸네와 또 충돌하게 되었다. 그것도 딸보다 사위와 육아 갈등을 겪었다. 사위는 엔지니어라서 그런지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걸 참지 못한다. 그 역시 인터넷 신봉자였고 심지어 직장에서 동료들과 나누는 육아 정보를 할미인 내 경험과 상식보다 더 믿었다. 그런 그를 참아내는 건 큰딸을 겪어내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때로 마음에 상처를 남기곤 했다.

예를 들면 그는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까지 단맛과 짠맛을 절대 맛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식을 먹이기 시작할 때 사위는 시판되는 이유식을 단계별로 주문해서 배달받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이유식이 가지 영양을 고려해서 만든 것이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재료들을 각각 구입하려면 돈이 더 든다는 것이었다. 이유식 브랜드 역시 어디선가 알아본 것이었다. 이때도 딸은 남의 일인 양 남편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라떼는 말이야' 대인 내게는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까탈스러운 큰딸조차 그렇게 유난을 떨지 않았던 것 같은데 사위는 이유식이 끝나고 밥을 먹일 때도 반찬까지 다 주문하고 싶어 했다.

딸이 출산휴가를 끝내고 직장에 복귀할 때쯤 첫 돌이 지난 아가는 어린이 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집에서는 밥 먹이는 일이 참 어려운데 비해 어린이집 선생님은 그곳에서 너무 잘 먹는다고 말씀하셨다. 메뉴도 다르고 친구들과 어울려 먹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서는 분명 어느 정도의 간이 들어갔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후 3시 반쯤 어린이집이 끝나고 데리고 오면서 참새방앗간처럼 동네 놀이터를 들르곤 했는데 거기서 만난 엄마들이 애들에게 간식을 나눠줄 때도 나는 사위의 눈치가 보여서 한사코 그 간식들을 거절해야 했다. 다른 애들이 먹는 걸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보면 안쓰러울 정도였다.

사위는 아이에게 정말 지극정성이다. 회사도 통근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가야 할 정도로 먼 곳이었고 승진을 빠르게 해서 회사에서 맡은 일도 많고 출장도 잦은데도 불구하고 아이 목욕은 물론이고 웬만하면 저녁밥도 자기가 챙겨 먹이려 한다. 물론 내 수고를 덜어주려는 마음도 있겠지만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그의 기술은 놀랍고도 감탄할 만하다. 내가 먹일 때는 한 시간이 더 걸려도 다 먹이지 못하고 힘이 드는데 사위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속삭이듯 조근조근 달래며 순식간에 다 먹인다. 왠지 사위에게 완패를 당한 느낌이 들곤 한다. 유치하게 사위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고 그가 원하는 할미의 육아 책임은 빨래 같은 가사도우미 수준인 것 같기도 하다.

4년이 지나면 내 육아 책임이 끝나고 그들은 독립하기로 했기에 딸과 사위는 많이 절약하고 돈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어쩌다 내가 아이를 봐주며 둘이 데이트라도 하고 오라고 내보내도 비싼 외식은 하지 않고 카페에서 간단히 커피나 마시고 오는 것 같다. 그런 그들이 아이에게 이유식과 반찬까지 사 먹이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사위에게 놀란 게 있다. 그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주말에는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자기네 집으로 간다. 딸이 따라가지 않고 아이를 혼자 뒷자리의 카시트에 앉혀가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행여 가는 도중에 보채면 운전하면서 어떻게 감당할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아가도 잘 적응해서 차를 타면 곧장 잠에 빠져들거나 사위가 미리 준비한 노래를 들으며 잘 간단다. 처음에는 당일로 다녀오더니 요즘은 하룻밤 자고 온다. 친할아버지는 우리 세대답지 않게 요리에 재주가 있으셔서 딸도 그분이 만드신 요리를 맛보고 놀랐는데 아가 반찬도 잘 만들어 먹이신다. 심지어 그 댁 외손주는 할아버지가 만든 치킨만 먹는단다. 나도 평생 음식 못한다는 말은 듣지 않았는데 그런 사돈댁 음식 솜씨에 비길 수 없고 내게 신세 지지 않으려는 건지 우리 집에서 가능한 밥을 먹지 않으려 하는 사위는 자기 집에서 마음 편히 밥 먹고 아이도 친할아버지 할머니와 친하게 해 주려고 주말을 그곳에서 보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분들이 만들어주신 뭇국이나 미역국, 멸치볶음 같은 것을 싸들고 와서 일주일간 아가에게 먹일 수 있게 한다. 처음에는 그런 사위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몇 년을 함께 살아도 절대 우리 가족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아니 절대 우리 가족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는데 차츰 익숙해져 가니 서로가 편하고 이젠 오롯이 딸과 우리 부부만 남는 주말이 기대되고 그런 주말에 셋이서 맛집을 찾아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한다.

또 하나 사위가 금지하는 게 있다. TV 나 휴대폰을 보게 하는 일이다. 한창 '아기 상어'에 빠져있는 아이를 달래서 밥을 먹이는 미끼로 자주 이용하던 아기 상어나 노래 동영상을 가능한 보여주지 말라는 것이다. 나도 주워들은 상식이 있어서 밥을 다 먹인 후에 보여주곤 했는데 얼마 전 영유아검진 때 의사 선생님이 미디어 노출을 가능한 금지 하라 했다며 그동안 자기 마음에 품고 있던 불만을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TV를 켜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남편이야 자기 방에 있는 TV를 보면 그만이지만 내가 영화를 좋아해서 들여놓은 70인치 TV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에만 켜져있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그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 집에 더부살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다. 사위도 내가 만드는 반찬을 어느 정도 믿어주어 더 이상 반찬 주문을 하지 않는다. 또 자기가 즐겨보던 모든 것을 갑자기 끊었는데도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떼쓰며 보채지 않는 착한 손녀를 위해 요즘은 사위 몰래 30분 정도씩 뽀로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저런 갈등에 그들과 약속한 4년이 빨리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곤 하지만 때때로 4년이 지난 후에 과연 손녀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유치원이든 학교든 다녀 온 후의 시간에 아이를 어떻게 혼자 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