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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Apr 28. 2023

할매 퇴근 좀 하자!

퇴근 시간을 되찾고 싶은 할매!

딸네랑 합칠 때 약속한 것이 몇 가지 있다. 딸네 부부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그 시간이 내가 육아에서 퇴근할 시간으로 지키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두 돌 지난 손녀가 요즘 들어 말이 늘어나고 나와의 애착관계가 깊어지면서 종일 붙어있으려 한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오후에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입에 달고 사는 말이 '할머니, 나랑 노자(놀자)'이고 할아버지가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돌아오시면 나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바카테(바깥에) 가자'이다. 또 자기 부모가 퇴근해서 내가 내 방으로 들어와 쉬려고 문을 닫으면 자지러지게 운다. 딸 부부는 나를 쉬게 해 주려고 애를 데려가려 하지만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통곡하는 아가를 문밖으로 내쫓게 되지 않는다.

밤에도 나와 같이 자려고 아예 내 침대에 미리 올라가 있거나 부모의 손을 벗어나 내 방으로 뛰어와 재빨리 문을 닫고 자기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건 노동법 위반이야'라고 외치지만 소용없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평소에는 별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그 애착이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문제는 내 몸이 편치 않을 때이다. 며칠 전부터 요즘 들어 유행하는 몸살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병원에서는 가족들에게 전염될 수 있으니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라 했다. 어지간해서는 마스크 쓰는 게 너무 답답해서 코로나가 오기 전에 미세먼지로 온 가족이 마스크 쓰기를 강조해도 못들 은척 했고 코로나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하는 수 없이 마스크를 쓰거나 그게 싫어서 아예 외출을 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행여 아가에게 감기를 전염시킬까 봐 마스크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까지 쓰고 있어야 하니 숨쉬기도 힘들 정도인데 아가는 이게 또 신기한지 자기도 씌어달라고 조른다. 밥을 먹일 때도 한 숟갈 먹을 때마다 마스크를 조금 내려서 받아먹곤 한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지만 종일 내 뒤를 따라다니고 소파에 누워서 잠시라도 쉬려 하면 '할머니 일어나, 여기 앉아'라며 재촉하는 아가가 짐스럽기까지 했다. 견디다 못해 남편에게 잠시라도 아가를 봐달라고 부탁하고 내 방 침대에 누웠는데 남편은 역시나 입으로만 놀아준다. 눈을 TV에서 떼지 않으면서 내게로 달려오는 아가를 향해 '이리 와'만 반복한다. 딩크족으로 살겠다는 딸에게 애를 낳기만 하면 우리가 다 봐주겠다고 그리 설득하던 남편이 '봐준다'는 말은 결국 돌본다는 뜻보다는 눈으로 지켜봐 주겠다는 뜻임을 새삼 깨닫는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러 가는 길에 남편이 호기롭게 말했다. '오랜만에 외출이니 편하게 놀다 와, 아가는 내가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놀아줄게'라고. 그런데 10분쯤 늦게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잔뜩 퉁명스러운 말투로 '아가 똥 쌌어'라고 말한다. 옷도 벗지 못하고 아가 똥부터 치우면서 그가 돌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런 남편에 비해 아가의 아빠인 사위는 오히려 딸보다 더 살뜰하게 아가 똥을 치우고 그 어려운 밥 먹이기도 조용조용 놀이처럼 잘 먹인다. 또 우리 부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가가 돌 즈음되었을 때부터 카시트에 싣고 혼자서 자기 집으로 아가를 데려가서 하루이틀 자고 온다.  처음에는 행여 가는 동안 아가가 울면 어떻게 하나 싶어 많이 불안했는데 그렇게 버릇들인 그들의 친가 나들이는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되었다. 친가에서는 자주 얼굴을 보니 아가와 낯설지 않고 워낙 희생적인 사랑이 많으신 친조부모에게 아가는 큰 애착을 갖는다. 가끔씩은 친가에 가자고 신발을 신고 들어오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사위가 피곤한 몸을 일으켜서 데리고 가곤 한다. 얼마 전에는 다리를 다쳐서 친가에 머물던 사위가 왔다 가는데 사위를 데리러 온 할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떼쓰면서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가잖아. 나도 가야지'라며 말해서 우리 모두를 한참 웃게 만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이의 양육에 적극 참여하는 사위의 모습과 우리 남편의 모습이 비교되니 딸이 가끔씩은 불평을 한다. '아빠는 우리 자랄 때도 기저귀 한번 안 갈아주셨어?'라고 묻는다. 그런 말을 들으면 또 딸에게 섭섭해진다. 나는 그런 남편을 문제라 생각지 않고 평생 견디며 살았는데 그는 당연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듯 아빠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섭섭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몸살은 나의 그런 아량마저 다 무너지게 만들어서 남편에게 야속하고 마스크를 벗지 못하게 내 방으로 뛰어오는 손녀가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매일 병원으로 출근하다시피 주사를 맞고 링거를 맞는데도 빨리 낫지 않는 몸살도 야속하다. 의사는 무조건 며칠 푹 쉬라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래저래 황혼 육아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엮어가는 사랑의 매듭들이 참 소중하다. 문득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효도는 다섯 살 때까지 해주는 예쁜 짓이 전부이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 예쁜 효도를 함께 받고 있는 우리 부부는 조금은 버거운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문득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딸네 집이나 아들네 집에 머물면서 할아버지도 없이 혼자서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할머니들이 자식들이 그 힘듦을 공감해주지 못하면 몸과 마음이 얼마나 서러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이 모든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노후의 조금은 짐스러운 행복이지만 아가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에 부딪혀서 자기가 아주 작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서 받은 이 사랑으로 '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였구나'를 기억하며 자존감을 되찾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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