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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지현 Jan 24. 2020

어디선가 흐르고 있을 라디오의 향수, 유열의 음악앨범

과거로의 회귀, 라디오의 향수

내가 중학생 시절, 그러니까 10년 전쯤 독서실에서 전자사전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청취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DJ는 박경림이었는데, 어두컴컴한 독서실의 1인용 책상 불빛 아래, 이어폰 소리가 행여 새 나갈까 볼륨을 한껏 줄이고 의미 없이 펜만 쥔 채 작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시절을 기억한다.

공부할 때는 방을 치워도 재미있다더니, 박경림 씨가 읽어주던 정체 모를 이들의 사연들이 얼마나 재미있고 꼭 나의 일 같던지 모른다. 사연 후에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던 노래들과 그때의 유행가들이 흘러나왔고, 그렇게 두시간을 훌쩍 때워 공부도 하지 않았으면서 괜스레 뿌듯한 마음으로 제 할 일을 다 한 듯, 그렇게 집에 가곤 했다.


1986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로 대상을 수상한 유열은 '가을비', '이별 아래'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대중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가 1994년부터 2007년까지 DJ로 진행한 라디오 '음악앨범'은 1987년 시작되어 가수 윤형주, 박인희를 거쳐 현재는 이현우가 DJ로 활동하며 그 명성을 아직도 탄탄히 이어오고 있다.

< 유열의 음악앨범 >의 핵심 소재도 라디오다. 지지직거리며 주파수가 맞춰지고, 포근한 시그널 송이 반갑게 흘러나오던 빵집에서 첫 만남이 이뤄지면, 그 후 타이밍의 부재로 엇갈리고, 우연을 가장한 운명 같은 만남 후엔 또다시 오해로 엇갈린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들리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사랑하는 이에게 전력 질주하며 뛰어가는 그 이야기까지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다. 단지 배경이 되어 나오던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라디오만이 특별함을 선사했다.

스트리밍 사이트에는 음악만이 존재하지만, 라디오에는 음악과 이야기가 존재했다. 누군가의 사연을 읽어주면 DJ는 거기에 걸맞은 음악을 틀어주었고, 그 사연의 주인공이 신청한 곡이 흘러나왔다. < 유열의 음악앨범 >은 그러한 라디오의 특성을 부각했다.


미수와 현우가 '천리안'메일로 연락이 닿았을 때는 희망에 가득 찬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흘렀고, 엇갈린 타이밍 후에 다시 만났을 때는 토이의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가, 집에서 같이 요리를 하며 데이트를 할 때는 이소라의 '데이트'와 루시드 폴의 '보이나요'가 흘러나왔다. 떠나는 미수를 향해 뛰어가던 현우의 모습을 비추며 루시드 폴의 '오, 사랑'이 흘렀다. 한 편의 라디오가 눈앞에 재현되듯, 오래전 노래들은 그렇게 추억을 불러댔다.

점점 개인주의로 변해가는 우리 세대는 남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혼밥, 혼영, 혼카가 유행하고, 각박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 시대에 남의 이야기가 들릴 리 없다. 현재 라디오가 설 곳을 잃어가는 이유다. 가사보다는 음악의 소리에 집중하고, 소통보다는 일단 나부터 잘살고 봐야 하는 세상. 소통의 부재는 이야기의 부재로, 이야기의 부재는 라디오 청취의 부재로 이어졌다. 남들의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 그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관심 밖의 일이다.


영화는 1994년, 유열이 처음으로 음악앨범 방송을 시작하던 때로 돌아간다. 편의점 대신 슈퍼가, 체인점 빵집 대신 동네 빵집이 대부분이던 그때의 거리를 보여주며 과거를 녹여낸다. 레트로는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게 하고, 지난 시간을 떠올려 괜스레 눈물짓게 만들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 시절의 모습을 마주하고, 라디오에서 나오던 그 음악을 마주한다.

문명의 발전에도 라디오만큼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과거로의 회귀가 반가운 이유다. 시그널 송의 순서로 시간을 알아채고, 내가 신청한 사연을 읽어주지 않을까 하던 기대감, 운명처럼 나에게 누군가 편지를 남기진 않았을까 하던 설렘. 음악이 사연과 함께 들려오니 더 특별하게 와닿던 순간들이 있다. 다소 미지근하던 이 영화가 남겨준 건 지금도 여전히 어디선가 흐르고 있을 라디오에 대한 향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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