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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Dec 14. 2022

여행지에 남긴 방명록, 아니 비망록

파주 모티프원에서 보낸 이박삼일

2022년 12월 12일.


- 12월의 어느 월요일 먼 파주에 혼자 왔습니다. 그렇잖아도 날이 짧은데, 비까지 내려 을씨년스러운 저녁에 모티프원에 도착했습니다. 예약을 할 때에도 무척 망설였는데, 오는 길에도 이게 좋은 선택이었을까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숙소 문을 열자마자 주인이신 이안수 선생님께서 무척 반갑게 맞아주셔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일층 서재에 내려갔다가 마침 커피를 내리고 계셨던 선생님을 마주쳐 커피도 얻어 마셨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편안히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체크인 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곳에 오면 글을 쓰려고 만년필을 가져왔습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하는 것이 내 자아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과거형 문장인 걸 보면 아시겠지만 모두 멈춘 지 제법 오래됐습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하던 그 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보고 싶으면 만날 수 있나,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오는 길에 두고와 버렸나. 글도 쓰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고, 여행도 하지 않는 지금의 내가 나라는 것을, 그저 여기 지금 숨쉬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살아있던 때를 그리워하는 지금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요?


- 그래도 이곳에 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진을 찍고, 여행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어젯밤 짐을 챙기면서 만년필의 촉을 정비하고 잉크를 채웠습니다. 첫 밤이 아직 다 가지 않은 지금 꽤 많은 생각을 글로 남겼습니다. 불현듯 잉크를 병째 가져오지 않은 것이 아쉬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그 애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2년 12월 13일.


- 이박삼일 여행의 가운뎃날이었습니다. 읽으려던 책들과 정리하려던 생각들을 반도 채 해치우지 못했는데 밤이 됐습니다. 남은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여행자의 하룻밤>을 펼쳤습니다. 책은 작가의 말로 시작합니다. 여행을 사랑한 작가는 여행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살기 위해 자신의 집을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며, 그 공간을 '휴먼북 라이브러리'라고 소개합니다. 짧은 고민 끝에 책을 덮고 그곳에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 "바쁘지 않으시면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하고 청하니 선생님께서 흔쾌히 응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세 시간동안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강렬한 시간이었습니다. 저와 오래 안 사이도 아니고, 그저 몇 시간 대화를 한 것만으로 저를 이해하고 제게 필요했던 조언을 해주는 분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습니다.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하나하나 잊기 아까울 정도로 마음이 통하는 대화였습니다. 잊기 전에 글로 남겨야만 한다는 생각에 방에 돌아와 글을 썼습니다. 계획한 일은 반도 못 했지만 제가 얻고자 한 것은 오늘 밤에 모두 얻은 것 같습니다.




2022년 12월 14일.


- 오늘까지 여기에 글을 쓸 계획은 없었습니다. 어제 글을 실컷 쓰고 자리에 누운 게 새벽 네 시 반이었거든요. 늦잠을 잘 테고 체크아웃을 해야 하니 글을 쓸 시간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에 볕이 참 잘 들더군요. 창을 열어두니 시원한 겨울 아침 공기와 따뜻한 햇살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대한 선생님 부부께서 허락해주신 덕분에 창 앞 나무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는 여유가 주어졌습니다. 덕분에 이곳에 오면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이뤘습니다.


- 이렇게까지 많은 지면을 차지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 아니 몇 시간 전에 쓰고 잔 글이 아쉽더군요.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조각을 이 글을 읽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젊지만 또래에 비해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만큼 좌절도 많았고, 제 삶에 확신을 갖기까지 먼 길을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경력도 늦게 시작했습니다. 그냥 직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나는 이렇게 굽이굽이 돌아와야만 했는지 괴로워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사실 그 과정이었습니다. 직진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지금처럼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어제 선생님과 대화 중에 제가 감명 깊게 본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야기를 했는데요. 모두에게 추천합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목표로 가는 여정을 그립니다.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할 때마다 그가 고르는 선택지는 그리 이상적이지 않아서, 우여곡절을 겪고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순간만 잘라서 보면 실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실은 그 모든 좌절과 고난이 그가 바라는 곳에 닿기 위해 꼭 필요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 삶이 그랬듯이 여러분의 삶도 그럴 겁니다.


-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놀랐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그 모든 과정이 지금 여기에 있는 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경험들이었다고, 그런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직접 해봐야만 얻을 수 있는 값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살아온 제 인생을 오래 곱씹은 끝에야 할 수 있었던 생각을 선생님은 그저 몇 시간 듣고도 하시더군요.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을 쓴다는 게 스스로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 들어 하게 됐는데, 선생님께서도 '자신을 타자화 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활동'이라고 표현하셔서 크게 공감했습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도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인상 깊었던 한 마디를 나누자면, "두려워 하지 않고, 부러워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를 꼽겠습니다. 미지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부러워 하지 않는 삶은 이미 살고 있어서 어떤 말씀인지 깊이 이해했습니다. 선생님의 조언대로 제 선택에 확신을 갖고 성큼성큼 걸어가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마음 먹습니다. 대화 끝에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자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되어주는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답하셨습니다. 역시 오길 잘했습니다. 덕분에 오늘은 가볍게 돌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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