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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Nov 15. 2018

윤동주, 자기와 세계를 연결하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소확행'을 염려한다: 세계소외의 발생


웰빙, 힐링을 넘어 소확행의 시대다.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여행을 통해 여유를 찾으며 분주함 속에 부대낀 나를 위로한다. 격무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찾은 숨구멍이자 이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나는 소확행의 트렌드를 염려한다. 자칫, 소소한 행복에 과하게 집중하노라면 자아는 세계/광장으로부터 멀어져, 밀실 안에 안주하게 된다. 안주의 기간이 길어지다보면 세계와의 연결은 끊긴다.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의 감정을 돌보며, 끝날 줄 모르는 자기긍정/자기혐오의 물레방아 속에 갇히든지, 중독적 행위로 자신을 놓아버리는 자기방기를 일삼기 쉽다. 그동안 세계는 자아로부터 소외된다. 아렌트가 말한 '세계소외' 현상이다.


그러나 자아는 세계와 영원히 분리될 수 없다. 자아는 엄연히 세계라는 현실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다만,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제3국으로 탈출한 이명준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사회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체제대립 뿐 아니라, 밀실/광장 간 대립에서도 결국 회피했을 뿐이었다.


세계소외가 발생하는 만큼의 빈자리는, 결국 무사유 및 무관심이 메꾼다. 그리하여 그만큼의 도움이 필요한 밖-세계의 가난과 살인을 방조한다. 악마의 얼굴을 한 인간만이 살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히만은 악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에게는 성실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의 무사유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일조했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 자기와 세계의 연결


한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하나가 윤동주이다. 시어의 간결함과 심미성 때문이요, 민족주의 시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이기도 하다. 2017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와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던 바 있다. 이로써 그간 우리 학계에 등장했던 윤동주에 대한 여러 뛰어난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 자기-세계의 관점으로 그를 본다면 윤동주가 지닌 보편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윤동주는 자신과 세계를 연결지어 생각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기성찰과 세계사랑(amor mundi)이 언제나 상존했고, 양자가 분리되지 않았다.



쉽게 씌어진 시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줄 알면서도

한줄 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學費封套를 받어


大學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가?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쉽게 씌어진 시>에서 윤동주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에서 세계로, 그리고 세계에서 내면으로 향한다. "홀로 침전하는" 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를 부끄러워 한다. 자기성찰이다. 자기성찰은 자기애 혹은 자기혐오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전자가 윤리로서의 에토스[ethos]라면, 후자는 정념을 의미하는 파토스[pathos]다. 자기성찰은 세계라는 보편의 눈으로 자기가 객관화되어야만 가능하다.


윤동주는 육첩방에서 창밖의 밤비를 바라보며 등불을 밝힌다. 어둠을 밝히고자 하는 그의 의지요, 기다림의 선언이다. 성경에서 등잔에 기름을 채운 신부들이 기다림을 감내하고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는 소극이 아닌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자아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밀실 안에도 마땅히 세계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완벽히 그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분열의 긴장을 그대로 안고 있다. 때문에 나로 돌아와 악수해야 한다. 세계와 연결된 자아에게만 가능한, 눈먼 나르시즘 없는 참된 자기위로의 지점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만다. 나는 세계를 사랑하여, 타자를 끌어안고 세계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일조하기를 갈망하나, 나만의 방 속에서 자기혐오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그렇게 자기소외와 세계소외의 사이에서 서성이는, 분열된 나의 자아에 윤동주는 위로의 악수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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