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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Sep 13. 2019

Love for the Other

기도모임 네 번째

기도모임 네 번째이다. 드디어 믿음-소망-사랑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애초에 이 시리즈를 기획했을 때부터, 믿음과 소망에 관한 말씀 본문을 정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사랑’은 너무 쉬웠다. 사랑의 교과서는 고린도전서 13장 아니던가. 그런데 이번 예배를 준비하면서 기도하던 중에 불현듯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라는 말씀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이 말씀은 메시지가 분명하다 못해, 사람의 영을 찔러 쪼개는 말씀이다. 그래서 본문으로 정하기에는 자칫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냐, 나는 못한다”는 불평이나, “(그렇게 살지 못해) 너무 죄책감이 든다”는 낙심을 부를 수 있다는 고민이 들었다. 기도모임 당일까지 고심하며 기도하다가,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고린도전서 13장과 나란히 두었다.



사랑의 본질: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놋쇠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고 온갖 신비한 것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나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잘난 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린도전서 13:1-7)


세상에서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짧다고들 말한다. 사랑을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의 감정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에서 감정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사랑은 '오래 참음'의 행위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데이트 어플을 통한 속전속결 만남에 익숙하고 원나잇에 쿨하게 대처하는 요즘의 20대조차도, 노인이 되어서까지 서로를 위하는 사랑, 아내 혹은 남편의 병환을 곁에서 지켜보며 오래도록 수발하는 사랑을 보면 감동한다. 진정한 사랑은 시간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이렇듯 자기 유익을 희생해서라도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수고(살전 1:3)로울 수밖에 없다.



사랑의 대상: 원수와 타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한 말을 듣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라.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어라. 누가 네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 하거든 십 리를 가 주어라. 네게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아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는 말씀을 듣지 않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도리이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무원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복음‬ ‭5:38-48‬)”


본문에서 예수님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속옷을 빼앗으면 겉옷을 주란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란다. 내 이익도 챙기기 바쁘고, 최대한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바보가 되라는 소리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해주기도 벅찬데, 내게 상해를 입히는 자들을 사랑하란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음은,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통해 큰 죄를 탕감받았기 때문이다(마 18:23-35).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될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으셨고 화목 제물이 되어주신 덕분에 용서받았다. '원수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며 의문을 품는 우리에게, '너희가 받은 것이 곧 원수사랑'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수'라는 말속에는 본질적으로 상대에 대한 증오가 전제되어 있다. 또 이 '원수'는 곧 타자이기도 하다. 타자란 나와는 다른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이를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들이기보다 미워하고 배제하기 쉽다. 인류는 역사상 자신과 다른 언어, 종교, 민족을 야만인 취급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며, 정복하고 살인했다. 이질감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인간이 극복해내지 못한, 이 어려운 것을 예수님이 행하셨다. 그래서 아렌트는 예수를 용서의 발견자라고까지 칭한다. 이 머리로 이해 안 되는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야말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자들과는 달리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의 의무: 값비싼 은혜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값싼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본 회퍼에 따르면 값싼 은혜(cheap grace)란 곧 그리스도를 뒤따르고 사랑의 수고를 감내하려는 의지 없이, 또한 죄에 대한 뉘우침과 회개 없이 은혜를 거저 받은 것으로만 보는 행태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사랑받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거저 받은 것 같은 은혜 조차, 사실 내막을 살펴보면 예수의 죽음을 대가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본 회퍼는 그래서 값싼 은혜가 아닌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를 강조한다. 은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은(값비싼 은혜는) 우리를 제자도로 부르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기 때문에 은혜이다. 그것은 사람들로 자신의 삶을 대가로 지불하게 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삶을 내어 준 것으로 인해 그들을 살게 하기 때문에 은혜이다. 그것은 죄를 정죄하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모임의 한 친구는, 이 기도모임을 통해 처음으로 예수를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의 고백이 모두를 감동시킨다. 그는 최근 혐오는 혐오를,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임을 깨달았단다.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면서,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더란다. 오늘 성경본문이 너무나 맞는 말씀이라며 고백한다. 말씀이 너무 강렬하다던 나의 걱정을 무색하게 하며, 모태신앙들을 한순간 못해신앙으로 만드는, 진심 어린 삶의 고백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19:30)더니 그는 벌써 복음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었다. 사랑받은 자가 어떻게 사랑하는 자가 되어가는지, 그는 삶으로 증명하고 살아내고 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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