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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B Sep 20. 2019

흥 내려온다, 힙이 내려온다

흥과 힙의 종합예술, 온스테이지 2.0 "범 내려온다"

새로움의 나라: "힙"의 등장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건만, 우리는 언제나 새 것을 찾는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유행과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나라 중 하나다. 하룻밤 새에 수도 없는 유행이 피고 진다. 가요는 차트 1위부터 100위까지를 플레이하고, 패션은 가장 최신을 반영하여 올해 유행이 내년과 다르며, 새롭다고 뜬 유행의 중심지가 몇 년 만에 젠트리피케이션을 겪고 또 새로운 동네로 옮겨간다. 요새는 "힙하다"라는 형용사로 온통 새로운 것이 수식된다. 힙한 장소, 노래, 패션, 사람에 모두의 시선이 주목된다.


범 내려온다: “힙과 흥”의 폭발적 분출

나는 문화의 힘의 정도에 다소 회의적이다. 문화 결정주의를 배격하며, 문화라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문화는 정치보다 대중에 가까이 산재되어 있어 개별성, 다양성, 심지어 자폐적 고립성까지도 허용되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가끔 나는 하부가 상부를 침투해 반란을 일으키기라도 하듯, 어떤 새로운 문화적 자극을 만나면 내 이성과 감정이 온통 뒤집어 엎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실 이런 경우는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어제 만난 이 영상(맨 아래 참고)은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도 모자라 내 혼을 빼놓는다. 네이버 문화재단의 [온스테이지 2.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업로드된 동영상이다.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범 내려온다"라는 작품이다. 판소리와 밴드와 현대무용과 현대미술이 이렇게 완벽한 "힙과 흥"을 창출해 내었다니. 감히 예견하건대, 조금의 운만 더 따라준다면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만한 영상이 될 것이다.


이날치, 소리꾼 밴드

이들 아티스트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더욱 흥미롭다. 소리꾼과 밴드로 구성된 이날치는 올해인 2019년 4월, 음악감독 장영규(51)에 의해 결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장영규는 기존에도 전통을 재해석한 '비빙'이나 '씽씽'을 선보였던, 실험적인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베이스는 장영규와 '장기하와 얼굴들' 출신 정중엽, 드럼은 씽씽의 이철희, 그리고 소리꾼들은 권송희·박수범·신유진·안이호·이나래 등이다. 이들은 이미 5월 '현대카드 큐레이티드' 공연에 초청받았을 정도로 핫하게 떠오른 신예팀이다. 판소리 '수궁가'를 재해석한 '들썩들썩 수궁가'로 단독공연을 진행한 적도 있다(출처: "씽씽 장영규, 이번에는 '이날치'···소리꾼 프로젝트", 뉴시스, 2019.04.19 참고).

이번 영상의 "범 내려온다"도 수궁가의 일부이다. 별주부가 토생원(토끼)을 부른다는 것을, 호생원(범)을 잘못 불러 발생하는 에피소드로, 범과 자라의 익살스러운 대화가 흥과 재미를 더한다(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고). 이번 "범 내려온다"는 그중 일부를 해체하고 반복하여 만들어낸 곡으로, 범이 내려오는 장면을 맛깔나게 묘사한 장면이다. 고백하건대, 판소리는 도통 몰라 심드렁하게 반응했던 나이건만, 이 음악을 듣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어가 지닌 묘미가 이 안에 다 들어있다. "좌르르르"를 소리꾼 셋이 돌려 부를 때는, 모래가 실제 흩어지는 마냥 공감각적 시상을 낭낭히 불러일으킨다. 흥미로운 것은 밴드의 구성이다. 북소리 대신 베이스 두 대와 드럼으로, 하이톤으로 들썩들썩 흘러가는 판소리음을 뒷받침하며 안정적으로 흥을 완성시킨다. 브릿지 부분에서 댄스팀과 보여주는 조화가 또 기가 막히다. 존재감으로 빈 곳 없이 톡톡히 메우고, 지루할 틈도 없이 힙하게 고조시킨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눈을 사로잡는 힙한 전통의상과 춤사위를 선보이는 팀은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Ambiguous Dance Company)이다. 힙합, 발레, 비보잉, 현대무용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이미 국내 및 해외 관객을 홀렸던 팀이다. '바디 콘서트'라는 작품으로 ‘2012 MODAFE 국내 초청작’, ‘2015 ASAC 몸짓페스티벌 공연’, ‘2016년 서울아트마켓 PAMS Choice’에 선정됐으며, 첫 해외공연인 ‘2017 루마니아 시비우 국제 연극제’에서는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바 있다(출처: "현대 무용의 대중화 이끈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의 ‘바디 콘서트’", 인천신문, 2018.07.04). 이번 영상에서는 범이 내려오는 모습을 들썩들썩한 춤사위로 묘사한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 귀 찌어지고, 몸은 얼쑹덜쑹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동아같은 뒷다리, 전동 같은 앞다리 쇠낫같은 발톱으로" 내려오는 범의 모습이 저리도 흥겹고 익살맞을 수 있을까. 한 열을 만들어 서서히 움직일 때는 한 마리의 범을 보는 것만 같다. 정육면체 무대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동선은 또 어떠한가. 밴드의 무대는 어디며 춤의 무대는 어디인가. 누가 주이며 누가 부인지 알 수 없는, 경계를 넘는 그들의 움직임에 짜릿함을 느낀다. 저 틈에 끼어 함께 흥을 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나는 이미 이 영상을 수십 회 돌려보았다. 반드시 보시라. 그리고 이 흥과 힙에 취해보시라. 달뜨게 흥분시키는 경험이 아닌, 멋과 흥과 힙이 어우러진 새로움에 번쩍 뜨이는 경험이 될 것이다.



https://youtu.be/SmTRaSg2fTQ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 귀 찌어지고
몸은 얼쑹덜쑹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동아같은 뒷다리, 전동 같은 앞다리 쇠낫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 격으로
잔디 뿌리 왕모래를 좌르르르 흩으며
주홍 입 쩍 벌리고
‘홍앵앵’허는 소리 산천이 진동, ‘홍앵앵’ 허는 소리 강산이 뒤눕고 땅이 툭 꺼지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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