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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인간 Oct 06. 2024

시온주의라는 거악에 관하여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작년 10월 7일에 일어났던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팔레스타인이 세계 뉴스의 중심이다.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어린이를 포함한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하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전쟁의 양상이 하마스의 가자지구를 넘어서 헤즈볼라의 레바논으로 확대되고 있고, 하마스와 헤즈볼라 모두의 뒷배가 되는 이란으로까지 불길이 번질 기세다.


많은 세계의 언론들이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간인 학살에 상당 부분 초점을 맞춰 보도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언론의 주된 관심사는 중동 정세 불안정으로 인한 유가 급등 가능성과 이로 인한 한국 경제에의 부정적 영향에 주로 향해 있다. 사실, 지구 반대편에 가깝고 가끔 뉴스에서나 들어보는 가자지구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우리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보다는 당장 내 차에 넣을 기름값과 내가 일하는 회사의 성패, 그리고 내가 투자한 주식 가격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유가의 움직임에 더 큰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두 달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에 끼치는 영향도 중요하고.


하지만 왜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은 왜 그토록 폭력적인 가자지구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잃거나 평생 남을 장애를 가지게 될 가자지구 어린이에 대한 깊은 측은지심과, 이러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장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시사문제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불과 100여 년 전에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역사적 울분을 겪었던 민족으로서 동병상련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세계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오늘 소개할 책은 그러한 이해를 위해 읽어야 할 책 한 권만 꼽아야 한다면 일순위로 추천되어야 할 책이다.



정환빈 저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은 저자가 KOICA 팔레스타인 사무소에서 3년 동안 일한 경험과 8년 동안의 연구 끝에 집필한 800 페이지 짜리 팔레스타인 역사서다. 한국 교양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각 챕터 말미에 있는 수십 페이지짜리 각주와 참고문헌만으로도 저자가 객관적인 관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 시온주의자 관점의 문헌과 팔레스타인 원주민 관점의 문헌을 고루 참고해 가면서, 있는 그대로의 팔레스타인 역사를 기술하고자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아래는 이 책을 읽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더 상세하게 또는 새롭게 알게 되었거나 기존의 상식이 근거 없는 편견과 오해에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내용들이다.


1) 흔히들 이슬람교와 유대교 사이의 뿌리 깊은 반목이 현재의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교와의 반목이 더 뿌리 깊은 쪽은 이슬람교가 아니라 기독교였다. 시온주의자가 발호하기 전, 팔레스타인 인근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과 아랍 무슬림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였다. 오히려 유럽의 유대인은 기독교인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아래 인용은 아랍의 유대인과 유럽의 유대인의 처지를 비교한 수많은 예들 중 일부이다.


카이로 게니자를 연구한 학자들은 무슬림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이 크게 억압받아왔을 것이라는 서구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유대인의 권리가 대체로 잘 보장되었다고 본다. 납세증명서만 있으면 어느 지역이든, 심지어 국경 너머로 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 정부의 승인하에 유대 공동체만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고 혼사나 유산, 구성원 간의 불화 등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대 법정이 공인되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다. (p.149)


중세 유럽에서 가장 박해가 심한 지역은 스페인이었다. ... 하지만 1391년에 심각한 폭동이 일어나 주요 도시들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인구의 절반인 10만 명 이상이 살아남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들은 폭동이 끝난 후로도 계속해서 기독교도로 남도록 강제되었다. 그렇지만 3세대가 지난 뒤로도 개종자의 자손들이 유대인과 어울리며 비밀리에 유대교 관습과 의식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자 스페인왕실은 교황청의 허가를 받고 이단심판청을 직접 운영했다. 이단심판관들은 1480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많은 개종자들을 유죄로 판결하고 박해했다. 세비야(Seville)에서는 8년 동안에만 7백 명이 화형 당했다. (p.163-164)


2)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팔레스타인이 무주공산인 것으로 착각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조상의 땅에 들어가 유대인들만의 '민족의 고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소수의 유대인을 포함하여 토착민이 수천 년 동안 삶의 터전을 일구어왔던 곳이다. 시온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금력과 무력을 써서 토착민을 몰아내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팔레스타인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처럼 토착민의 존재는 지워버렸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수많은 책에서, 심지어는 여행기에서도 아랍인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 안 되는 언급도 황야를 유랑하는 고대 시기의 베두인들로만 묘사하며 동방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 후진적인 곳이라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형성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팔레스타인은 황폐하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땅'으로 상상했다. 따라서 그들은 주인 없는 땅을 '발견'한 것이고 약속의 땅의 진정한 주인인 기독교도들이 땅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p.255)


시온주의는 토착민을 해치는 식민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온주의자들의 눈에 아랍인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저항은 시련을 의미할 뿐 '유대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대의를 포기할 이유로 생각될 수 없었다. '시온 외의 시온주의' 진영이 팔레스타인을 대체할 다른 지역을 찾았던 것도 아랍인의 권리를 해칠 수 없다는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 힘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영국에 동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요청할 때 저항하는 토착민을 추방할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p.383)


3) 시온주의자들의 무리한 이스라엘 건국은 홀로코스트 등으로 극에 달한 유대인 혐오에 대한 서방의 자기반성, 그리고 그에 따른 영국과 미국 등의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했던 독립의 약속을 깨뜨렸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는 유엔총회에서 유대 국가를 승인하게 된다.


1939년에 대항쟁이 진압당하고 2차 대전이 끝나기까지 팔레스타인은 그야말로 시종일관 유럽인들의 땅인 것처럼 다루어졌다. 아랍인들을 회유하려는 이유도, 반대로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이유도 모두 유럽의 이익으로만 결정되었다. 이러한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은 유럽인들이 잘못을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점에 달하게 된다. (p.637-638)


4) 팔레스타인을 비난할 때 사람들은 그들의 테러가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하마스의 2023년 10월 7일 공격 때 벌어진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강간은 절대 공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테러의 원조는 이스라엘이었고 그 규모나 잔인함, 악랄함도 현재 팔레스타인의 그것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의 테러는 가자지구에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민간인 피해가 정말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보다 적어도 수십 배 이상 많은 민간인을 학살해 왔는데도 비판받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버스나 시장 등 공공장소에서 고성능 폭탄을 터트려 어린아이들마저 무차별로 학살하는 테러는 시온주의자들이 먼저 시작했고 급하게 선보인 일들이었다. 가령 1938년 7월에는 하이파의 아랍 시장에서 두 차례 폭탄을 터트려 74명을 죽였고, 1939년 2월 27일에는 각지에서 폭탄 테러를 다발적으로 저질러 38명을 죽였다. 1946년 7월에는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King David) 호텔의 별관을 폭발시켜 91명을 죽였다. 이외에도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을 전후로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을 도륙했고,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도 이는 계속되었다. 앞서 언급한 뮌헨 참사로 죽은 11명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살해한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도 민간인이었다. 1982년에는 레바논에서 3천 명 이상의 비저항 비무장 난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는 9.11 테러의 사망자 수치와 같은데도 비난은 약했고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잊혔다. (p.585)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 절대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 9월 18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불법이며 이스라엘은 1년 안에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유엔 결의안에 회원국 절대 다수인 124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이유도 그런 의미에서 분명하다. 해당 결의안에는 한국을 비롯한 43개국은 기권했고 이스라엘과 미국 등 14개국만 반대표를 던졌다.


2000년 10월 29일, 팔레스타인의 15세 소년이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이 소년은 열흘 후에도 돌을 던지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한국일보.



집요한 근현대 역사 비평을 통해 팔레스타인이 현재 모습이 된 이유를 밝혔다.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라는 부제와는 다르게 팔레스타인 쪽에 기울어진 논조이고,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의 비호 및 유대인 혐오에 대한 반성 등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지만, 정작 그곳에 사람이 살아왔다는 점은 이상하리만치 간과되었다.

하마스의 민간인 학살 및 강간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 뿌리에는 이스라엘의 과거 테러행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학살은 정당성도 없고 적반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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