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의 쇼팽 에튀드
2022년 6월 18일,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의 상전이相轉移를 이룬 사건이 발생했다. 7년 전에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보골보골 끓기 시작했다면, 그날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클래식음악계는 본격적으로 기화하며 증기기관을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얼핏 피아노 앞에 앉은 원빈처럼 보이는, 시크하게 휘날리는 세련된 더벅머리가 조각 같은 콧날과 얼음처럼 서늘한 눈빛을 패션 소품인 듯 가리곤 하던 만 18세의 청년이, 악보상의 콩나물 대가리 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악명 높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세상에서 처음 들어보는 다이내믹한 해석으로 연주하여, 초로의 지휘자로 하여금 종국에 눈물을 닦게 만들고, 청중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이끌더니, 실황 유튜브 조회수가 클래식 동영상으로는 세계 기록에 육박하는 1500만을 넘기도록 한 그 순간부터,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계는 세계의 클래식 평단으로부터 세기의 연주자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그 전설의 시간으로부터 대략 2년쯤 후 발매되어 또 하나의 전설이 되고 있다. 이 음반에 대한 세계 평론가들의 호평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내가 음원 다운로드를 위해 자주 애용하는 '프레스토 뮤직'에서 이주의 음반으로 소개되었다. (2) 영국의 음반 매거진 '그라모폰'으로부터 무려 이달의 음반으로 선정되었다. (3) 별점 짜기로 유명한 가디언지의 깐깐한 평론가 앤드류 클레멘츠로부터 별 다섯을 받았다. (4) 음악 전문 웹사이트 'All Music'에서 별 다섯 개와 함께 '에디터스 초이스'로 선정되었다. 이것들 말고도 내가 모르거나 건너뛴 여러 호의적인 리뷰들이 나와있을 것이다.
음반은 쇼팽의 그 유명한 에튀드 Op.10, Op.25 전곡을 담고 있다. 영어로 'study' 쯤으로 번역되는 불어 에튀드 étude는 음악에서는 테크닉을 연마하기 위한 짧은 연주곡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연습곡' 쯤으로 불리는데, 이 용어에 혹해서 바이엘 정도 치는 피아노 초보가 쇼팽 연습곡에 도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도전은 자유다.) 각 작품마다 12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Op.10 3번이 '이별의 곡', Op.10 12번이 '혁명'이라는 부제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을 날리는 피아니스트라면 일생 한 번쯤은 녹음을 남긴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음반이 있다. 프레스토 뮤직에서 검색하면 Op.10은 181종, Op.25는 180종의 음반이 나온다. 그만큼 쇼팽 에튀드는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진검승부 아레나라고 할 만한데, 임윤찬의 에튀드는 그중에서도 탑 급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다. 이제까지 쇼팽 에튀드의 가장 뛰어난 명반으로 꼽히던 마우리치오 폴리니 Maurizio Pollini의 젊은 시절 1972년 녹음에 필적하거나 넘어선다는 얘기까지 있을 지경이다. 믿거나 말거나.
임윤찬의 쇼팽 에튀드는 처음 들을 때부터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좀 서두르는 듯하고 특히 빠른 템포의 곡에서는 느긋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빠름의 감각은 글렌 굴드의 첫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젊고 자유로운 영혼이 뿜어 올리는 순도 높은 열정. 그의 연주는 곡 간의, 그리고 곡 안에서도 표현의 콘트라스트가 강하여 각 곡이 내포하고 있는 특색을 더욱 증폭시킨다. 피아노 연주를 좀 아는 평론가들은 내성부(멜로디를 주로 담당하는 높은 성부, 또는 가장 낮은 성부를 제외한 화성의 중간 성부) 표현이 인상적이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내가 듣기에도 모든 손가락의 타건이 똑같이 살아 숨 쉰다는 느낌이다.
폴리니의 에튀드와 (감히) 비교해 보자. 폴리니의 연주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마치 AI를 연상케 한다면, 임윤찬의 연주는 꽤 인간적이어서 젊은 인간이 치고 있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폴리니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자라면 임윤찬은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다. 폴리니는 Op.10 3번 '이별의 곡'처럼 흐물거리는 감성이 필요한 순간에도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임윤찬은 '이별의 곡'을 그 자신이 겪은 연인과의 이별을 노래하듯이 진폭이 큰 루바토로 서정적으로 연주한다. 임윤찬의 빠른 곡이 나름 재미있고 튀는 해석이 있지만 약간의 설익음도 느껴진다면, 그의 느린 곡은 어려서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젊은 예술가의 진정성이 담겨 있어, 보다 빛을 발한다. 폴리니가 대리석으로 지은 아크로폴리스라면, 임윤찬은, 특히 느린 곡들이, 따뜻한 질감의 나무로 쌓아 올린 목가풍의 전원주택이다. 그렇다고 임윤찬의 연주가 나이브한가? 오히려 반대로 그의 연주는 손이 베일 듯 날카롭고 정교하다. 비유를 확장하자면, 정교한 부조가 조각된 나무 전원주택이라고 할까?
임윤찬은 갓 스물을 넘긴 나이지만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꽤나 묵직하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당시 '18세의 몸 안에 108세의 어른이 들어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그의 천재성은 인터뷰할 때도 드러난다. 인터뷰어의 눈을 거의 마주치지 않고 진중하게 띄엄띄엄 얘기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서번트 증후군을 보이는 자폐아 천재를 연상케도 한다. (팬들이여, 미안하다!) 그의 이런 모습에서 임윤찬 쇼팽 에튀드의 또 다른 얼굴인 폐쇄성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서번트 증후군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천재적이지만 폐쇄적인 곡 해석. Op.10과 Op.25를 한꺼번에 이어서 듣는다면 장대한 한 시간짜리 연주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날레로서 Op.25의 마지막 세 곡에서 아껴두었던 격정을 폭발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Op.10과 Op.25를 한 틀에 가두고 완결된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재능.
임윤찬의 데카 데뷔 앨범으로, 쇼팽의 에튀드 Op.10과 Op.25 전곡이 담겼다.
손을 베일 듯 날카롭고 정교한 연주와 감정의 폭이 매우 넓어 에튀드 감성 증폭기라 할 수 있다.
그라모폰지에서 이달의 음반에 선정되는 등 호평을 이어가고 있다.
서번트 증후군으로 오해할 만큼 임윤찬은 자폐적 수줍음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