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스 어니언>과 선택적 인지 Selective Awareness
최근 웹콘텐츠 업계에서 유행하는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은 기본적으로 비디오 게임 문화에서 잉태했다. '전생의 모든 기억과 경험치를 지닌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서 얻게 되는 우월적 경험은 기본적으로 게임의 '다회차 플레이'가 제공하는 감각이다. 5~7만원 정도 가격으로 형성되어 있는 '풀 프라이스 full price' 게임들은 짧게는 20여 시간에서 길게는 100시간 정도의 플레이타임을 제공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시간 단위 오락의 비용으로는 그리 비싼 편이 아님에도 유저들은 더 큰 가성비를 누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게임들이 '엔딩을 보고 나서 강해진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다시 플레이' 했을 때의 전능감과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사실 '다회차 플레이' 말고도 상당수의 웹툰/웹소설에서 '스테이터스 창'과 '시스템 메시지'가 당연하게 등장하는데, 이러한 비디오게임의 인터페이스가 동세대에 얼마나 당연하게 자리잡았는지를 새삼 실감케 한다.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저자는 최근 젊은 세대가 콘텐츠를 감상할 때 "모든 정보를 대사로 설명해주기를 바란다"면서, '능동적으로 소비하기는 것을 귀찮아하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제작현장에도 영향을 끼쳐 은유적인 연출 방식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이 책의 진단이 사실이라면 '모든 능력치를 수치화해서 보여주는' 스테이터스 창이야 말로 이러한 기조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문법 아니겠는가.
(반면 처음보는 영화나 드라마는 1.5배속이나 스킵으로 빨리빨리 보는 식으로 '가성비' 소비를 지향하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나 장면을 만나면 이를 여러 번 감상하는 '다회차 플레이'가 이제 영상콘텐츠 감상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도 포함되어 있다.)
종류는 조금 다르지만 '소울라이크'로 분류되는 게임들은 애초에 처음 플레이하는 유저는 도저히 클리어할 수 없는 극악의 난이도로 시작하게 만든다.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덮쳐오는 위협에 거듭 죽고 죽으면서 마침내 돌파구를 찾아내는 종류의 희열은, 게임 캐릭터가 강해지는 것과 함께 플레이하고 있는 내가 실제로 성장하고 있는 기분을 선사한다. 이러한 서사를 고스란히 구현한 영화가 바로 톰 크루즈 주연의 <엣지 오브 투모로우>. 끊임 없이 죽고 부활하면서 매번 장애물의 돌파구를 습득해 나가는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소울라이크' 게임의 플레이 방식이다. 거의 10년 전 개봉한 영화였으니 최근 만연한 '게임 서사'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조금 빨랐는지도 모르겠다. (<두니아>도 좀 빨랐던 것 같아...)
*아래에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과 <식스센스>(...), <디 아더스>(...) 등등의 반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스센스>의 반전은 언제까지 지켜줘야 하는 걸까...
넷플릭스의 새 추리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비로소 OTT시대의 추리영화가 시청자로 하여금 어떻게 '트릭'을 경험하게 만들지 새로운 문법을 제시했다. 그동안 스릴러, 추리영화의 가장 중요한 트릭은 늘 '반전'이어왔다. 그건 당연한 것이, 처음부터 범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마지막에도 역시나 범인이면 김이 새잖아. 그래서 결국엔 '범인이라고 절대 예측하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람'이 마지막에 범인으로 밝혀져야 쫄깃한 맛이 있고, 이것도 반복되다 보니 영화 좀 본다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제일 무고해 보이는 사람들부터 의심의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하기도 한다. 심지어 초반에 '너무 유명한 배우'가 무고하게 등장하면 '실은 범인!'일 가능성도 너무 다분해졌고.
'반전'의 완성도 여부가 관객들의 만족도를 판가름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애초에 마케팅 때부터 "충격적인 반전!", ""스포일러 금지 서약 시사회!!" 같은 걸 홍보문구로 잡을 때도 많았는데, 그런 걸 볼 때마다 '아니, 반전이 있다는 걸 처음부터 얘기하고 보는 서사가 반전 서사야?'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반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애초에 모든 서사를 의심의 눈으로 볼 수 밖에 없고, 그럼 반전이 의미가 없는 걸. 아무래도 이야기가 어떤 방향을 향해 흘러가면 '아 마지막에는 뜻대로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잖아.
<식스센스>가 역사에 남는 반전 영화인 것은, 반전을 모른 채 영화를 따라가도 충분히 자연스러운 이야기였다가 마지막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그 동안 보았던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완전히 새로운 맥락으로 재편성되는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제시된 어떤 요소도 이 반전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고, 그래서 한편의 영화가 통째로 새로운 이야기로 재배치 되는 경험에서 반전의 전율이 온다. 이 정도로 완전한 구조를 갖춘 반전 영화는 내 기억으로는 니콜 키드먼 주연의 <디 아더스>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 경우는 "실은 주인공이 귀신!"이라는 결말마저 같아서 그냥 <식스센스>의 반복으로 보인다는 한계가 있긴 하다.
그 밖의 '반전영화'로 일컬어지는 꽤 많은 영화들은, 영화 내내 결말과 상관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막판에 가서야 "짠! 모두 망상! 정신병!"이라든지 "놀랐지! 실은 얘가 범인!" 같은 식의 결말만 따로 노는 반전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반전이 있습니다'라고 홍보를 하고 있으니 효과는 더더욱 빈약하다. "<식스센스> 이후 최고의 반전"이라는 홍보 문구의 반복은 역설적으로 <식스센스> 같은 반전 영화는 이제 없을 거란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반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움이 되는 시대는 이제 지났으니까. 그러니 개봉 당시에 무슨 영환지 아무것도 모른채 포스터에 부르스 윌리스 얼굴만 보고 극장 가서 봤던 내가 진정한 승리자.
이런 시대에 추리물 작가들은 얼마나 고통스럽단 말인가. 이제 범인과 반전이 밝혀지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할 수 없다. 심지어 기술이 발달해서 그 옛날 애거서 크리스티 같은 사람들이 쓰던 대부분의 트릭은 오늘 날 무의미하다. 스마트폰과 CCTV의 등장은 전 세계 추리/미스터리 작가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게 됐다. 오죽하면 <작은 아씨들>과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은 '내 영화에 핸드폰 나오는 것이 싫어서' 시대극을 찍는다고 했겠는가. (아니, 사실 추리/미스터리가 아니어도 스마트폰은 많은 갈등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든다. 멜로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안타깝게 엇갈리는 것도 카톡의 시대에는 좀 더 어려운 일이다.)
이 와중에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전통적인 '후더닛(WhoDunit)' 장르를 조금씩 변주하는 것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재미를 준다. 명작으로 꼽히는 1편은 '후더닛'의 틀을 유지하되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래서 이야기는 '누가 진범인가(후더닛)'와, 명탐정 '블랑'으로부터 '범인인 주인공이 무사히 숨어야 한다'는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되며 새로운 재미를 준다. ('거짓말을 하면 구토를 한다'는 치명적인 장치까지!)
후속작 <글래스 어니언>은 아예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 영화의 트릭은 추리 서사 자체로는 그리 대단치 않다. 1편과 비교하면 그 긴장감이나 구조가 너무 단순해서 다소 실망감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극중에서 등장인물들을 속이는 데는 사실 큰 관심이 없다. 추리영화의 목표는 '관객을 속이는 것'이고, <글래스 어니언>의 트릭은 인간의 '선택적 인지(selective awareness)'다.
굉장히 오래된 심리학 실험 중 하나로, 위 링크의 '고릴라' 영상은 누구나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좀 더 유명한 영상에서는 '문워킹하는 곰'이다)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뻔히 눈에 보이게 모든 정보가 제시해 주었음에도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이야기다. 패스하는 횟수에만 정신이 팔려있다가, 다시 돌려본 영상에 멀쩡히 춤추는 고릴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의 충격은 이 실험의 유명세를 순식간에 부상시켜 주었다.
영화는 에드워드 노튼이 분한 '마일스'의 모든 살인 트릭을 마치 춤추는 고릴라처럼 화면에서 처음부터 그대로 보여 준다. '듀크'에게 독을 탄 컵을 건네는 장면, 그의 총을 훔쳐 챙기는 장면,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스마트 폰이 사라진 뒤 '마일스'의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모든 장면이 화면에 그대로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뻔히 그 화면을 봤음에도 이야기를 따라갈 때는 눈치 채지 못한다.
말인즉 이 영화의 트릭을 제대로 체감하려면, 화면을 다시 되돌려 그 장면으로 돌아가, "뭐야, 저게 저렇게 버젓이 보였던 거였어?!"를 관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다. 농구 선수들 사이로 지나간 춤추는 고릴라를 다시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충격이 찾아오는 것처럼. 극장에 찾아가 영화를 '온전히 한 번' 감상하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방식의 체험이다. 그 장면을 다시 보겠다고 일부러 극장을 다시 찾을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OTT시대, 모두가 10초 스킵을 하고, 1.25배속으로 영화를 보고, 놓친 장면은 돌아가 다시 보는 시대에만 제대로 체감할 수 있는 방식의 트릭인 것이다. 겹겹이 감싸놓았지만 결국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는 '유리 양파'의 비유는 극중 인물들을 풍자하는 메타포로도 쓰였지만, 추리 영화가 새로운 시대에 어떤 트릭을 구현할 수 있는지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회차 플레이'를 이제 극중 주인공의 경험이 아니라 화면 밖 관객에게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훌륭한 반전영화들은 결말을 알고 난 뒤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면 전혀 다른 영화로 보인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데(<메멘토>와 <식스센스>가 그렇듯이), <글래스 어니언>은 같은 장점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넷플릭스 오리지널' 추리영화다운 배포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상 관습들이 작품의 내용에도 어디까지 영향을 끼칠 것인지 상상해보게 만드는 영화였달까. 이런 실험을 이런 거대한 제작비로 할 수 있는 것도 다 넷플릭스 시대라서 가능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