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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성민 Jul 11. 2023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번역소설'

유이월 짧은 소설집, 『찬란한 타인들』

유이월 작가의 소설집 『찬란한 타인들』을 읽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일단 굉장히 짧다. 책 자체도 작고 가벼운 판형에 2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소설집이라 손에 들면 소책자 같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 안에 수록된 소설들은 더 짧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엽편' 소설들이다. 그렇잖아도 다른 책들에 비해 글자수가 적게 자리할 수밖에 없는 자그마한 판형의 지면 위에 제목이 들어가는 편집을 위해 시원하게 페이지 절반을 비워놓고 시작해서는 다음 페이지의 마지막 줄까지도 채우지 않고 끝나는 소설을 포함해 길어봐야 대여섯 페이지 정도 이어지는 짧은 소설들이 나뭇잎처럼 옹기종기 책을 채우고 있다. 나는 책을 느긋하게 곱씹으며 읽는 편인데도 가벼운 기분으로 반나절이 채 안 되어 다 읽었고, 아마 책을 좀 빨리 읽는 사람이라면 한 시간 안에 마지막 장을 충분히 덮을 것이다. 숏폼의 시대에 소설도 엽편의 유행이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과연 소설계의 릴스라 하겠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에 한참 유행했던 책들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나 『공포특급』 같은 종류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엽편 모음집이었는데 유행이 돌고 돌아 더 세련된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물론 읽는 부담이 적다고 해서 다 재미있는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독특한 매력은 다른 것이다. 명조체로 쓰인 '찬란한 타인들'이란 제목과, 그 밑에 작게 박혀 있는 '유이월 짧은 소설집'이란 단정한 설명은 동시대의 여느 한국 소설 단행본을 떠올리게 하지만, 책을 펼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이름들은 '햄튼 샌드위치 가게의 주인 마누엘 로메로'와 '같은 이민자인 마르케스', '웨이코의 대형 닭공장' 같은 이국적인 고유명사들이다. 응? 물론 한국의 저자가 해외를 배경으로 외국인 화자를 쓴 소설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장들부터가 익숙한 한국소설의 문장들과 묘하게 질감이 다르다. 그런 문장 위로 영어 이름들이 얹혀 있으니 번역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날개로 돌아가 저자의 소개를 다시 읽어본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글과 관련된 여러 직업을 거치다가 결혼 뒤 미국에서 10년을 살고 돌아온' 저자. 그러니까 그는 한국어로 문학을 배우고 한국의 문학들을 읽었지만, 미국이란 사회에서 영어로 10년 동안 사고하고 돌아와 다시 한국어로 소설을 쓴 것이다.


번역된 소설들 보다는 한국 문학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건 아마 누군가 소설을 '왜 읽는가'에 따라 조금씩 온도가 다를 텐데, 서사와 사건, 그러니까 '이야기'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주로 번역된 외국의 소설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큰 것 같고, '예술로서의 문학', 그러니까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문장, 그 속에서 조사의 쓰임과 비슷한 어휘들이 만들어내는 파리한 긴장 같은 것들을 예민하게 느끼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한국소설을 선호하는 것 같다. 물론 번역서도 훌륭한 번역가분들이 이러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려 고군분투하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나는 번역된 소설은 사실상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가능한 그 나라의 언어로 누리고 싶다. 가능한...


다른 나라의 소설들은 꿈도 못 꾸지만, 그래도 영어는 원서도 좀 읽어 봤다고 영미 문학의 번역서를 읽고 있으면 '원문은 뭐였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일이 몇 문장마다 한 번씩 일어난다. 눈으로는 한국어 문장을 읽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자꾸 영어를 떠올리며 듀얼코어를 쓰다 보니 힘이 몇 배로 든다. 물론 그것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다.

원서를 갖다 읽을 정도는 못 되지만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구조까지 한국어와 비슷하다 보니 비교적 원문에 충실하기 쉬운 일본 쪽 번역서들을 볼 때는 또 번역을 거치면서도 휘발되지 않은 일본어 특유의 말투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외서를 원서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수록 좋은 번역임이 느껴지는 번역서를 만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몇 년 전 한국사회에 때아닌 '번역 논쟁' 같은 문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김영하 소설가 번역의 『위대한 갯츠비』라든지, 고 이윤기 선생의 토속적인 번역으로 한국 근대 문학을 읽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게 만들었던 『그리스인 조르바』같은 소설들은 '이렇게 문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옳으냐'의 논쟁을 떠나 독자로서 읽는 즐거움만큼은 더할 나위 없었다.


이상한 얘기 같지만 『찬란한 타인들』을 읽고 있으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번역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완벽한 번역은 없다'며 번역가들이 토로하는 고통은 수도 없이 들었고 십분 동의해 왔는데, 자 여기 완벽한 번역의 소설이 있다. 다만 원서가 존재하지 않을 뿐. 당연한 일 아닌가. 미국사회에서 영어로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는 사람이, 자신이 전공한 완벽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해서 쓴 소설이니까. 그래서 묘하게 번역투로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으면서도, 원래 영어 문장은 뭐였을지 의문이 전혀 쫓아오지 않는 이상하게 편안한 낯선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명이나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들도 그렇지만, 아마 번역서였다면 '슬리퍼'로 번역했을지도 모르는 '플립플랍' 같은 일반명사나 '투고(to-go) 해 온 아메리카노' 같은 표현들도 이런 느낌에 일조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소설의 색깔에 대해 작가의 말에서 '똑같은 사건도 다른 외투를 입히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그 의도는 정확하게 적중했다. 종종 '문신'을 굳이 '타투'라고 부르고, '어색함'을 '어쿼드'라고 말하는 이들을 그저 재수 없는 '겉멋'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장면들을 만나는데, 물론 재수 없는 것도 맞고 허세 때문에 그렇게 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어쩌면 이들은 언어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서일 수도 있다. 언어는 살아있어서, 사람들이 쓰면 쓸수록 뉘앙스와 맥락이 더해지며 원래의 색깔을 잃는다. 한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힐링'이나 '욜로' 같은 단어들이 얼마나 빨리 낡고 촌스러워졌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럴 때 모국어가 아닌 영어 단어를 가져와 쓰는 것은 원래 단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맥락을 팡팡 털어내고 다시 단정한 의미로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유이월 작가의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낯설고 편안한 단정함들이 바로 그런 것들 같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그의 소설이 소설로서, 훌륭하기 때문에 빛을 발한다. 소설의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눈길이 오래 머무르는 문장들이 참 많았다. 그러니까 밀도로 따지면 꽉 찬 소설인 것이다. 소설집 두 번째 엽편에 실려있는 몇 문단은 너무 사랑스러워서 책을 읽다 말고 앞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한 줄 한 줄 소리 내어 읽어주기도 했다. 아내는 함박 웃었다.


옮겨 적을 수 있는 몇 구절들을 이곳에 옮겨 본다.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다린다.


     바다를 보러 온 사람들은 대체로 좋아 보인다. 쓸쓸함이나 괴로움 때문에 바다를 찾아온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의 뒷모습에는 그 쓸쓸함과 괴로움을 적극적으로 누린다거나 달콤하게 증폭시키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 비밀을 지키는 법 中     


     글쎄,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뮤지컬 배우가 되기엔 성량이 풍부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녀가 해 왔던 음악의 결이 그것과 다르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을 좇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게다가 로렌의 서투름은 나아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본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투를 때 가장 빛이 나는, 그런 유의. 연습이 거듭될수록 그녀는 자신의 빛과 멀어졌고, 한편 그 자신은 성장을 전제하면서 서투름을 스스로 끊임없이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인내심은 거실에 깃드는 오후의 빛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길게 들어왔다가 곧 스스로를 거두어들였다.

- 기만과 행복      


     앤젤리나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피웠던 말보로 멘솔이 생각났다. 진짜 쫙 붙게 맛있었지. 어차피 피우지도 못할 담배인데, 도저히 참지 못하고 조지 킴에게 다가가 “실례지만 담배 한 대만요”라고 말한 것이 잘한 일이란 건 아니지만, 사실 그를 괴롭히려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지 킴은 물귀신을 보고 너무 놀라 ‘나를 끌고 들어가겠거니’ 지레 짐작을 해 버렸고, 두려움에 몸서리치다 폴딩 체어가 옆으로 쓰러진 것은 그냥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조지 킴도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냥 일이 그렇게 되는 것들’에도 숨겨진 과학성이 있으며, 물귀신들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앤젤리나는 끝까지 알지 못했고, 자신은 절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며 물귀신에 대한 오해가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을 평생 억울해 했다.

- 물귀신 매트릭스


     수박들이 잔뜩 쌓여 있는 매대 앞에서 이런저런 수박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생활의 모든 면에 기준이 있어야 하며 자신이 그 기준을 대체로 숙지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애그니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애그니스가 이런 것들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짓을 하고 있으면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 가서 가스펠송을 부르며 박수를 치는 느낌이랄까.

- 분명히 거기 있지만 왠지      


     게인스빌은 결단력이 부족한 지역이어서 겨울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잠시 가을의 치마폭으로 돌아가 있다. 나는 환절기의 희생자로서 며칠 고열에 시달렸으나 오늘은 ‘보호자’가 마지못해 허락을 해 줘서 집 앞 공원에 나와 계절의 우유부단함을 즐기는 중이다. 마음이 허허로운 날들에는 길게 앓으면서라도 시간의 공백을 채우는 일이 그리 고되지만은 않다는 것을 남편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병은 나아야 하고 배고픔은 채워져야 하는 것이니까.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이 고양이 혓바닥처럼 내 살갗을 까끌하게 훑고 지나간다. 남아 있는 미열이 나의 이른 외출에 그렇게 날을 세운다.

- 오렌지색 코트


     돌이켜 보면 나는 그녀에 대해 다소 열등감이 있었지만, 줄리아는 언제나 나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기회를 찾아야 하는 투철한 의욕을, 안목을 배우지 못한 이의 안전한 취향을, 그러니까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가난이 어느 정도 제공하는 생명력이라는 것을 조금은 간파하고 있었다고 할까. 내가 은밀히 감사하고 있는 그것을 말이다.

- 오렌지색 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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