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은 작가의 도쿄 작업실에서 발견한 다섯 가지 화두.
진보초의 고서점,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서점에서 책을 탑처럼 쌓아놓고 읽어요. 그러고 저녁에 돌아오면 외로운 줄 모르죠. 삶이 심플해야 행동반경이 넓어져요.
“북유럽의 겨울은 상당히 길어요. 그러니 독일에선 책을 많이 읽을 수밖에. 그 긴 밤을 어떻게 해.”
“돌이 아니라 밤이네요?”
도쿄 세타가야 구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작업실, 커다란 고무나무 아래에 놓인 밤 여섯 알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내가 없는 동안 화분 물이 새서 바닥이 썩었어. 보기 미워서 밤을 주워다 놨지.”
베를린과 도쿄를 오가며 생활하는 최재은에게 밤은 그런 존재다. 책을 읽게 하고 미운 걸 덮어주는. 작가는 1976년 패션 디자인을 배우고자 도쿄에 온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 흐름을 온몸으로 흡수했고, 세계를 누비며 자연과 시간을 탐험하는 작품 활동에 빠져 지냈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꿈의 정원>의 일원인 DMZ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작가는 다시금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지의 땅인 DMZ에 대나무로 만든 약 13km 길이의 공중 정원을 만들고 20m 높이의 전망대 ‘바람의 탑’, 9개의 정자와 남북한 멸종 위기 식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종자은행, 생태계 도서관 등을 만들겠다는 계획. 누군가는 꿈이라 하고 누군가는 외면하는 일을 직시하며 해답을 찾고자 앞장선 것이다. 도쿄에서 작가를 만나 동네 한 바퀴를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진보초의 고서점 거리를 누비며 반나절을 보냈다. 함께하는 매 순간 최재은은 새로운 호기심으로 감동하고, 열의에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작업에 빠져 살다 보니 중성화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책과 예술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대지가 품은 생명의 힘처럼 또렷하고 낭랑하며 온유했다.
최재은 작가가 살고 있는 세타가야 구는 도쿄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한적하고 작은 마을이다.
큰 도로로 나가려면 10분 정도 걸어야 하고, 집에서 3분 거리에 100엔을 내면 원하는 작물을 뜯어갈 수
있는 공동 텃밭이 있다. 그 골목의 한쪽에 10년 기른 높다란 아보카도나무가 반기는 아담한 집이 그녀의 도쿄 작업실이다. 차 없이 오가닉 라이프를 살고 있는 작가는 하루 1만 보 걷기를 실천한다. 베를린에 있는 자택은 티어가르텐 안에 위치해 10km 산책은 가뿐하다. 도쿄의 이층집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천고가 높고 한쪽 벽면에 젠 스타일의 커다란 격자무늬 창을 내어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슬라이드형 스틸 덮개가 있는 책장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은 경전처럼 읽었어요. 여러 권 사서 들고 다니고, 독일에도 두고 선물도 하고.” 작가가 몇 권의 책을 꺼내며 말한다. <월든>을 경전처럼 읽는 사람이라니, 그녀에게 느꼈던 시간의 간극이 훅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책은 이런 신비한 역할을 한다. 최재은은 스스로를 ‘싹을 틔우는 사람’ ‘Green Hand’라 하는데, 비단 식물을 잘 키우는 소질만이 아니라 작가로서도 그렇다. 30년 전 첫 개인전에서 이사무 노구치의 돌조각 위에 흙을 쌓고 씨앗을 뿌려 식물이 자라는 시간을 작품화한 것을 시작으로 1986년부터 지금까지 진행 중인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이후 ‘루시 Lucy’ ‘아소카의 숲 Forest of Asoka’과 DMZ 프로젝트까지 이어지는 작가적 맥락이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유럽 등 지구 곳곳에 전통 방식으로 만든 종이를 묻었다가 시간이 지난 후 꺼내는 작업. ‘신선한 흙은 내부에 어떤 자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자력으로 염분과 힘을 흡수한다. 이 힘이 흙에 생명력을 준다. 우리가 늘 흙을 뒤집고 파헤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라는 <월든>의 구절처럼, 다시 파낸 종이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엉겨 붙어 있고, 서로 다른 지층과 시간, 장소의 성격이 녹아 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가시화된 것이다. 책을 훑던 작가가 김수근 선생의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를 보여주며 말한다. “이 책도 젊은 사람들, 건축학도들이 꼭 읽으면 좋겠어. 서울에도 이제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니. 철학 없는 난개발을 하지 말고, 물줄기만 제대로 찾아놔도 도시가 살아요. 산부이치 Sanbuichi라는 건축가가 있는데, 곧 세계에서 톱이 될 거예요. 그는 자기가 어떤 건축을 담당하면 거기 가서 1년을 살며 그 장소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죠. 바람이 어떻게 불고, 토양이 뭐고, 물이 얼마나 있는지를 습득한 다음에 건축을 지으니. 이게 모던 풍수지리 아니겠어요?”
“서양에는 지금 언어가 없어요. 나한텐 그 언어란 게 시간관이란 얘긴데. 자연, 시간, 종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해요. 최근 6년 동안에 뭔가 새로운 자기 것을 갖고 있다고 느낀 작가는 피에르 위그 Pierre Huyghe 딱 한 명이에요.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잘 팔리는 작업을 하면 살기는 편하지만 외로워서 죽어버리죠. 고통스러워도 정말 성찰이 필요한 그런 삶. 그게 조금이라도 알 것처럼 느껴지는 날은 내게 최고의 날이겠지.” 작가는 어느새 호르헤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과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펼쳐 보인다.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핵심 이미지인 미로는 우주가 보여주는 혼돈 Chaos 상태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전개된다. 프리고진은 ‘복잡계 이론’을 통해 혼돈 상태가 자연계에서 정상적인 구조체라는 걸 열역학으로 정리한 인물. 최재은 작가의 작품집 <Lucy and Her Time>의 머리말을 쓰기도 한 그를 만난 후 그녀는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최재은의 작품 세계는 그들이 말한 바 있는 이 시간을 쪼개고 엮고 내밀한 부피를 미학적으로 가시화하는 작업에 다름없다. 세 사람은 관념적 시간이란 대주제로 묶여 있다.
만물상처럼 버려진 책을 모아 만든 작가의 작업 ‘페이퍼 포엠 Paper Poem’을 보자. 독일에서 사람들이 집 앞에 내놓은 책을 주워다 빛바랜 속지를 모아 콜라주 하고, 거기에 시를 썼다. 개별적으로 응축된 시간은 흡인력을 지닌 색으로 회생해 또 다른 시간과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폐기된 책의 생은 그렇게 윤회한다. 보르헤스가 자주 쓰던 ‘1001’이라는 개념처럼 무한히, 순환하는 삶. “특히 서양에서 동양의 종교, 인도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참 멋있어요. 불자는 아니지만, 잠재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쇼펜하우어가 불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기대하면 안 되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 안에서 불교에서 받은 영향을 어떻게 연결시켰는지가 더 중요한 거지.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란 책도 그래요. 요즘은 인도에 자주 가는데 그곳에선 무한함을 느껴요. 인도에는 거대한 시간이 있으니까. 해결책을 찾는다기보다 그 사람들에게 깔려 있는 시간성을 보는 거예요.”
‘아이가 아이였을 때’로 시작하는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처음으로 독일어의 매력을 알게 한 작품이다. 흑백 영상 위로 나지막하고도 강압적으로 읊조리는 발음이 근사했고, 분단된 베를린의 겨울, 포츠담 광장의 불완전함과 불안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일었다. 그러나 최재은 작가가 일본어판으로 출간된 빔 벤더스의 저서 <천사의 시선>을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부터 베를린에 있었던 작가는 요즘 서울에서 통일 전의 독일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낀다고 했다. “체크포인트 찰리, 거기 여권을 맡기고 얼마의 돈을 내면 하루 동안 여행 갈 수 있었어요. 12시 전에 돌아오면 돼. 동독에 아름다운 미술관이 많았잖아요. 불빛도 없는 컴컴한 거리에서 그걸 찾아 다니던 기억이 나요.” 동독에선 서독 TV를 볼 수 있었고, 어린 학생들의 진지한 토론과 분단 현실을 화두로 한 예술 활동이 활발했던 때.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는 그 시기를 지나며 이렇게 독백한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시간은 언제 시작하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꿈이 아닐까?’ 최재은의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바로 그 질문들이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불과 시간 Time and Fire’이란 제목으로 DMZ의 생성 과정에 관한 비디오를 만들었어요.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종 때부터 시작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 상태인 건 너무 비참한 거죠. DMZ는 꿈이 아니에요. 어떻게 해서든 이뤄야 하는 아주 중요한 과제죠. 가장 부드럽게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 그 안에 있는 생태계를 활용하는 거예요. 그곳에 존재하는 생명체와의 공존을 통해서 세계에 메시지를 던지고, 유일한 장소를 만드는 것.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거라고 보는 거지. 그리고 엄밀히 얘기하면 그건 우리 것만이 아니라 지구의 공동 자산이잖아요. 사람들은 이게 가능할까?라고 하는데 왜 가능하지 않죠? 문을 닫아버려 그렇지. M14라고 플라스틱으로 싸여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지뢰가 200만 개가 그 땅에 묻혀 있어요. 가령 지뢰 제거 대회 세계 공모를 내봐,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가 몰릴 것이며 그게 우리 자료가 될 거 아녜요? 진정성을 가지고 아이디어를 내야 해요. DMZ에 가보면 음악 소리 꽝꽝 나는 관광버스에서 관광객 무리가 왁자지껄 웃으며 내려요. 적어도 이러한 장소에 와서 경건해질 수 없는 걸까요? 정치성에 대한 개념을 찾아야 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도 전적으로 국민의 책임이죠. 선택을 한 건 국민이니까. DMZ는 영원한 미스터리야. 누구도 정보가 없어요. 그 조그마한 미크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르죠. 그 미지가 참 재미있
어요. 참가하는 작가들이 자연을 통해 성찰하고,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걸로 인해 인간이 전쟁 없이 더 유연하고 가까워질 수 없을까, 이런 게 내 콘셉트 아니겠어요?” 작가는 이 땅을 위한 안타까운 마과 메시지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 말들은 아이가 아이였을 때,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진정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나는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놀랄 만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바탕을 둔 정보 녹화 시스템에 연결된 기억의 시청각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중략) 비디오는 누가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다.’ – 백남준,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중에서(1988).
‘주의, 친애하는 존: 환경의 속성은 영화나 회화보다 TV에 더 많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TV(그 미세한 전자들의 임의적 움직임)는 오늘날의 환경 그 자체입니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1971).
최재은은 백남준 선생의 어록을 체계적으로 모아 번역한 거의 유일한 책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선생의 어떤 책보다 중요하다고 꼽는다. “이 책을 읽으면 선생님이 왜 미디어를 했는지, 미디어가 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도올 김용옥과 백남준의 대담집. 이걸 독일에서 찾아 오느라 혼났어. 이것도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어요. 아마 책으로 나와 있진 않을 거야. 오늘날 작가란 사람들이 진정하게 원하는 걸 충족시켜주고 이야기를 던지지 않으면 안돼요.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탄 건 그 때문이잖아요. 시게루 반,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이었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가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던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의 개념이 우리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막연한 콘셉트는 재미없어요. 인공지능과 다 쓰러져가는 환경문제 등 당면한 숙제가 많잖아요. 인공지능과 공생하려면 가장 먼저 도덕을 가르쳐야 해요. 그러려면 그걸 만드는 사람이 도덕적이어야 하는데 상실하는 게 너무 많은 시대잖아.” 최재은은 작가가 해야 할 일이 거기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문명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전문적인 매뉴얼을 찾는 것.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거 아니겠어요? 책임도 많고, 개념이 확실해야 해요.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고. 개념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 예술가니까. 욕망에 사로잡혀서 밸런스를 잡지 못하면 안 된다고.”
모든 걸 공유할 수 있고 편리하나 잃어버린 게 많은 시대. 우리는 상실된 빈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 소비와 생산의 굴레 속에서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하지 못할 때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며 자연은 사라진다. 때문에 최재은 작가는 DMZ 프로젝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세계 각국 작가들의 힘을 모으고자 한다. 재료는 빛, 물, 바람, 흙, 돌, 나무밖에 없다. 책을 주제로 반나절을 함께하며 본 최재은의 삶도 오직 이 재료들로 빚어낸 듯하다. “전시 마지막 날 피터 춤토르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전부 DJ 음악에 맞춰서 광란의 파티를 즐겼어요. 나도 같이 췄지. 기분 좋더라. 멋있는 전시를 하고 멋지게 놀기. 그렇게 살아야 해요. 항상 부족하고, 열망하고. 외로울 새가 없죠.” 어느덧 깜깜해진 저녁, 비밀을 말하듯 털어놓는 마음에서 낮에 걸었던 울창한 대나무 군락을 본다. 작가는 작업실 근처 공공 정원을 걸으며 매일같이 대나무를 관찰한다.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고 20~30m씩 옆으로 뻗어나가는 나무는 사계절 푸르며 또 얼마나 빨리 자라는가. 지진이 나면 대나무 숲으로 가라는 말처럼, 어지러운 땅을 위해 최재은은 대나무로 만든 공중 정원을 꿈꾼다. 마디마다 솜사탕처럼 털이 보얗게 붙은 어린 대의 생명력에 탄복하며 감동하는 작가는 이미 스스로 대나무가 되어 있었다.
*사진: 이재안
*본 글은 <HEREN> 잡지 2017년 2월호에 쓴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