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오마카세를 찾는다면 불광동의 작은 스시야 코스모 스시로 가 보자.
며칠 전 대학 시절 한 학번 선배가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나 예약했어."
은평구 불광동에 위치한 오마카세 코스모스시 얘기였다. 일전에 내가 소개한 후 계속 갈 기회를 노리다 예약에 성공했다는 것. 그녀는 나와 같은 학교 동아리의 선배였으나 자퇴 후 교대를 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먼 지역으로 발령이 났기에 자주 볼 수 없었으나 그녀와 나는 기본적으로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의 DNA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몇 년에 한 번 보아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약속 당일, 칼퇴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마치자마자 눈썹을 휘날리며 오마카세를 먹으러 달려갔다. 7:30분이 마지막 시작 시간이라 역에서부터 허둥지둥 뛰어야했다. 3호선 불광역에서 좀 더 가까우나 급한 마음에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렸더니 꽤나 걷는 느낌.
코스모 스시는 숙성 회초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얼마 전 수요미식회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오마카세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소개되었고, 유저들이 직접 맛집 점수를 주는 사이트인 망고플레이트에서도 초밥집 점수 상위권을 달리는 오마카세. 고급 스시야를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미식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나에게 이곳은 훌륭한 초밥을 합리적인 가격에 접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곳이다. 셰프의 말에 따르면, 고기도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에이징을 하듯이 생선도 감칠맛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숙성한다고. 숙성 시 이노신산이라는 물질이 나와 부드러워지는 것이란다.
처음 자리에 앉으면 차완무시를 주는데, 여기서 벌써 뭔가 특별한 기운이 느껴진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계란찜 위에 고운 주황 빛깔의 비스큐 소스를 끼얹고, 단새우를 곁들인 것.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다는 셰프의 이력을 첫방에 보여줄 수 있는 킥이 아닐까. 이곳에서 처음 이 비스큐 소스를 곁들인 차완무시를 만났을 때 눈이 번쩍 뜨였기 때문이다. 스시야에서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오마카세를 먹으러 와서 프렌치 레스토랑의 기운이 적절히 녹아드는 경험을 할 수 있구나. 짭조름하면서 바다 향 그득한 비스큐 소스로 미각을 확 깨워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도미는 화이트 와인을 베이스로 만든 베허블랑 소스 위에 탱글한 식감을 살려 살짝 쪄 냈다. 소스는 도미의 식감과 맛을 해치지 않으려는 듯 은은하게 감싸준다.
다음엔 사시미 플레이트. 동해바다에서 잡은 70kg짜리 대물 참다랑어라고 했다. 식사 전에 코스모 스시 인스타그램에서 참치를 해체하는 영상을 봤는데, 실제 그렇게 해체한 참치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다랑어 쿼터제가 실시된 후 어획량이 제한되어 국내산 생참치를 만날 기회도 흔치 않아진다고. 기름지고 신선해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이었다.
차가운 사시미를 먹고 나자 따뜻한 밥 한 술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찐 전복, 그 위에 전복 내장 소스를 끼얹은 요리가 나온다. 적당히 고소하고 짭조름한 바다 향이 고요하게 퍼지는 맛. 식감은 전복의 탱글함과 밥알의 부드럽고 찰진 감촉이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룬다.
이쯤에서 술을 시키고 싶었다. 스시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즐기기에 야마자키 스모키 매실주 온 더 락은 제격이다. 매실 향이 퍼지는, 달콤함을 품은 위스키. 봄밤에 딱 어울리는 술이다. 코스모스시에서는 스시와 어울리는 다양한 전통주를 선보이고 있으니 참고할 것.
그다음으로는 능성어, 돌돔, 광어, 훈연한 금태 등 흰 살 생선이 연이어 나왔다. 겉만 살짝 불맛을 입힌 금태는 입에 넣자마자 버터처럼 스르르 녹는데, 지방질과 크리미 한 물성의 살이 어우러져 황홀한 맛을 자아낸다.
처음 이 검은색 샤리를 마주했을 때 눈이 둥그레졌다. 네타를 폭 덮고 있는 저 검은 샤리는 무엇인가. 김? 해조류 간 것? 답은 오징어 먹물이었다. (글을 쓰는 이 밤, 갑자기 오징어 먹물 리소토가 격하게 먹고 싶다ㅎㅎ) 이럴 수도 있었나? 셰프님께 들어보니 일본에 오징어 먹물 샤리를 쓰는 곳이 왕왕 있다고 한다.
담백한 삼치도 불맛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껍질 부분을 바싹 훈연했으나 살은 촉촉하다. 훈연 향을 가득 머금은 이 코스는 입 안에 넣으면 마치 숲 속의 오두막에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대망의 우니. 같이 온 언니는 우니 마니아다. 자칭 우니 병에 걸려 우니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예약할 때도 우니가 너무 먹고 싶다고 코멘트를 남길 정도로, 할 수만 있다면 가게에 있는 우니를 판 째 다 먹고도 남을 사람. 이 코스가 나왔을 때 흥분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많이 벌어서 인간적으로 우니는 판 째로 먹읍시다 우리.
시메사바(초절임 고등어)로 만든 사바 보우 즈시(고등어말이)가 준비되던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 나는 등 푸른 생선 마니아. 그렇지만 고등어는 잘 다루는 셰프를 만나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조금만 서툴러도 비리거나 느끼하기 쉽다. 이곳에서 네 번 정도 식사하는 동안 매번 고등어를 먹었지만 한 번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만히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오마카세 ASMR을 해보고 싶을 정도로 재밌는 소리가 많이 났다. 흥미로운 주방의 풍경. 그 이후로는 이날 처음 시작하는 메뉴 아나고(붕장어)가 나왔다. 본 투비 장어 덕후인 나는 그저 즐거웠다. 숙성한 아나고는 포슬포슬한 식감에 사르르 사라져 버렸다. 눈 깜박할 사이의 꿈처럼. 그 뒤로는 남은 참치에 챔기름 듬뿍 뿌려 말은 마끼, 우니를 김에 턱턱 싸주시고.. 셰프가 아끼는 위스키 라가불린 12년 산도 한 잔 맛볼 수 있었다.
이 저녁을 함께 먹은 이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곳으로의 구직을 준비 중이었고, 나는 몇 번의 이직 후 최근 들어간 회사에서 막 적응기를 지난 단계였다. 새우깡에 깡소주 마시던 시절을 지나 스시야에서 만난 우리는 흘러간 세월만큼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언제나 여행하듯 살고 싶다는 마음만은 여전했다.
미식 생활은 우리를 쉽고 빠르게 다른 세계로 순간이동하게 해 준다. 그것은 비단 그 음식이 비롯된 국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만든 이의 세계. 요리가 탄생하는 과정, 식당이라는 장소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결합하여 만들어 낸 세계는 이방인에게 늘 신비롭고 감각적인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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