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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카몰리 Feb 27. 2019

우리는 하코다테에서 만날 수 있을까?

단편 영화 <하코다테에서 안녕>, 이별이 이른 이들의 홋카이도 여행.

영화 <눈부신 하루>(2006), <조금만 더 가까이>(2010),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6)에 이르기까지. 영화감독 김종관은 연인들의 만남과 이별의 순간, 사랑이 존재하는 연약하고 부드러운 순간을 지속적으로 그려왔다. 그가 만들어낸 사랑에는 억지가 없다. 한때 열렬했지만 지루하고 뻔뻔하고 그저 그렇다가 또다시 설레고 마는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시절의 이야기들. 그 평범한 진솔함을 장면과 풍경으로 말하는 것. 그것이 김종관 감독의 이야기를 계속 듣게 하는 힘이다.


김종관 감독의 6분짜리 단편 영화 <하코다테에서 안녕>이 시작하는 풍경.


2019년 1월이 시작되고 얼마 후, 유튜브에 김종관 감독이 그린 수묵화 같은 이별 여행 이야기, <하코다테에서 안녕>이 업로드됐다. <론리플래닛 코리아> 편집장의 인스타그램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링크를 따라가보니 <론리플래닛 코리아>가 홋카이도 관광청과 협업해 이 6분짜리 영상을 제작한 것이었다. ('3인 3색 홋카이도 겨울 여행'이란 테마로 김종관 감독을 포함한 총 3명의 크리에이터가 세 가지 버전의 여행 필름을 만들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이토록 아름답고 중독성 있는 관광청 홍보 영상을 본 적이 없다. 흩날리는 눈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세상을 덮어가는 풍경 위로 ASMR처럼 대화하는 연인의 목소리가 흐른다.


우리 이별 여행 가자
영화 속 등장하는 하코다테의 거리. 하코다테는 개항기 무역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거리 양 옆의 붉은 벽돌 창고는 현재 쇼핑몰로 개조해 운영 중이라고 한다.

여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헤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남자는 그것이 당신이 행복한 길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한다.

뽀드득뽀드득 눈 덮인 하코다테를 찬찬히 둘러보는 그들에게는 서로를 향한 온기가 남아 있다. 소중해서 놓아주어야 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때때로 이토록 잔인하다.

둘의 여행은 마치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풋풋하게, 하얀 눈 밭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듯 이어지지만 눈은 그 자국 위로 무겁게 내린다. 눈이 부신 풍경 속에서 마음은 부드러워졌다가 이내 먹먹해진다.


근데 우리가 왜 다른 세계에 있어?
김종관 감독이 담아낸 하코다테의 담담한 풍경들.


넌 아침에 있고, 난 밤에 있고
넌 여름에 있고, 난 겨울에 있고
넌 우주에 있고, 난 모래알 틈에 있어.
난 바람에 있고, 넌 오래된 집안에 있지


너와 내가 이토록 다른 세계인 거라고 담담히 말하는 안소희의 위 대사는 시의 한 구절 같다. 서로 다른 우주가 만나 놀랍도록 서로에게 스며든다. 연애는 그렇게 시작해 서로 다른 세계에 있다는 걸 끝내 확인하고 나서야 그 우주를 인정하게 된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모습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작은 다름이 나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음을 쏟은 만큼 그 존재감은 더 클 것이다. 하코다테의 연인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르던, 백지상태였을 때처럼 새하얀 설경에서 하얗게 서로와 멀어지는 일을 감당한다.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이들은 잊는 대신 기억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다른 세계에 있던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을 지우지 않고 기억하는 것.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이처럼 하나 같이 여행하듯 사랑한다. 어느 낯선 골목을 뚜벅뚜벅 걸어가듯.

이 영상을 봤을 때쯤 이별을 했다. 그래서인지 내겐 이들의 하코다테가 먼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처럼 느껴졌다. 혹은 더는 볼 수 없는 이에게 부치는 전언 같은 것. 여러 번 돌려 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땅, 하코다테를 보며 언젠가 눌러쓴 그 글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그리워하기로 다짐한다.


그러니까 오래 기억해. 하코다테, 우리가 같이 있던 세계, 여기 거리, 그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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